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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woojinkim.org/the-way/

새 블로그로 옮김.

한참 전에 회사에서 만들던 프로젝트 하나를 접고 그 다음 프로젝트는 도저히 답이 없어 보여서 - 심지어 책에 언급조차 되지 않음 - 재빨리 탈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첫번째 프로젝트는 책에서 언급한 처음으로 ‘비상 체제’를 도입한 그 프로젝트였고 비상체제 선언 후 ‘3명/일’의 속도로 팀이 사라졌습니다. 팀 전체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4주 정도가 지나자 더이상 팀에 남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좀 갑갑한 기분이 들어 카지노 라이크라는 글을 남겼었습니다. 저는 수많은 몇 백명에 달하는 ‘퇴사자’들 중 한명이었고 이제 종이 한장한장에 기록된 시간을 기준으로 훨씬 먼 미래에서 온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잠깐 저곳을 스쳤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판교로 이사와서 일하던 같은 건물의 같은 층의 같은 쪽 근처 자리에서 지금은 다른 회사의 다른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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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잘못된 예측 시도와 견제들로 인해 몇몇 팀은 인력구성에 신기한 특징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상적인 개발팀은 서로 다른 경험의 길이와 깊이를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있어야 합니다. 연차가 높은 사람들은 경험을 통한 문제해결에 기여할 수 있고 그보다 더 연차가 긴 사람들은 나름의 인사이트를 통한 프로파간다를 팀에 심어 팀을 이끌어나갑니다. 하지만 이들은 속도에서는 연차가 낮은 분들을 따라갈 수 없고 이들이 각자 조화를 이룰 때 올바른 방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리거나 잘못된 방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빠르게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 견제정책들로 인해 이 조치들이 뭔가 잘못됐다고 느낄만한 팀의 허리를 담당할 연차들이 일지감치 도망치고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1년차들과 이제 이력서가 완전히 꼬여 공개시장에서는 쉽사리 자리를 찾지 못하는 높은 연차들만이 회사에 남아 이들 사이에 언어를 통역해줄 사람들마저 없는 상태이기 일쑤였습니다.

이전에 카지노 라이크에서 언급한 적 있지만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이상했습니다. 회사에서 보유한 원작 지적재산권에 기반한 모바일게임을 개발해야 했습니다. 까놓고 이야기하면 현대에는 수집형 게임이라고 불리는 소위 도탑전기의 성장시스템을 배껴 핵심을 만들고 그 껍데기를 바꾼 게임을 개발하는게 목표였습니다. 이게 시스템디자인 관점에서 핵심 요구사항이었고 프로젝트 자체에 대외적으로 부여된 목표는 압도적인 그래픽과 촘촘한 성장경험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시스템디자이너인 저와 몇몇 사람들은 이제 이 촘촘한 성장경험이 대강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합니다. 이걸 아주 잘 만들 자신은 없지만 이걸 아주 잘 못 만들어 런칭 직후 게임이 밸런스로 인해 붕괴하게는 만들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시점을 기준으로 훨씬 미래에서 온 저는 여전히 압도적인 그래픽이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또 당시에 위에 이야기한 시스템디자인 관점에서 핵심 요구사항 이외의 목표에 대해서는 경영과 일선 실무자들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일선에서는 저 압도적 그래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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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평가가 팀과 프로젝트의 평가에 전적으로 연동되는 정책 역시 지금 돌아보면 그저 ‘허무맹랑하다’고밖에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반복해서 게임 개발업은 근본적으로 흥행산업이고 고객에게 전달되기 전에는 성공 여부를 판별하기 아주 어려우며 성공 여부에 따라 대박, 중박을 터뜨리거나 아니면 완전히 그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런 산업이라고 해 왔습니다. 또한 고객에게 제품이 전달되기 이전에도 내부 테스트들 역시 겉으로는 그럴싸해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정상평가이므로 우리가 나쁘게 마음먹으면 목표와 무관한 소수의 엣지포인트를 악용해 점수 전체를 조작할 수 있고 위에 이야기한 대로 완전히 그 반대로 동작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점수 자체가 의도적인, 또는 의도적이지 않은 조작에 너무나 취약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들의 평가가 연동돼있으면 내 평가 역시 흥행산업 또는 가챠나 흥행산업과 다름없잖아요. 인텔의 엔디 그로브 전 회장의 말처럼 결과로써 평가하는건 올바른 접근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내 행동에 관계 없이 결과로 평가받는다면 내가 ‘인재’로써 생산성을 발휘하고 이 높은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이 과정에 무슨 의미가 있게 될까요. 개인적으로 이런 조직을 ‘아카데미’라고 부르는데 이유는 사람들을 실무를 통해 잘 훈련시킨 다음 좀 쓸만할 때가 되면 평가가 폭망해 타사로 쉽게 이직해 능력을 발휘하기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이 평가방법은 회사를 훌륭한 아카데미로 만들었고 개인적으로 한동안 그 덕을 좀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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