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패스
한동안 이력서를 받아보면서 적어도 제가 본 이력서들에 한해서는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참여하는 프로젝트는 모바일게임을 개발하고 있으니 주로 모바일게임을 개발해본 적이 있는 분들을 보게 되는데 크게 MMO 게임을 만드는 분, 수집형 게임을 만드는 분, 그리고 조금 더 규모가 작은 캐주얼 게임을 주로 만드는 분들입니다. 캐주얼 게임을 한덩어리로 뭉쳐놓는데 다른 의견이 있으실 분이 많을 것임을 알고 있고 저 역시 이 분류가 그리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합니다만 오늘은 이 정도로 거칠게 분류해놓고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MMO 게임을 개발해보신 적 있는 분을 선호하기는 합니다. MMO는 그저 여러 장르 중 하나일 뿐이지만 게임 자체의 양상과 개발 진행과정, 각각의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마인드셋이 다른 장르 게임들과 다릅니다. 가령 이 장르는 대부분 규모가 꽤 큰 팀에서 개발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발에 참여하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카오스를 조금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프로세스를 만들어 지키고 서로 업무범위를 정의해 그 안에서 일하려고 합니다. 이런 행동이 결과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각 개인의 발전을 늦추는 결과를 만들 수 있을지라도요. 또 게임 자체의 양상이 상당히 다른데 이 장르는 게임 상의 수많은 부분을 동시에 다른 여러 사람들과 공유해야 합니다. 판타지 배경 게임으로 이야기하면 먼저 월드 자체, 필드에 깔린 몬스터들, 이들이 내놓는 보상, 게임 내 서비스를 제공하는 NPC들, 심지어는 플레이하기 좋은 자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한정된 자원을 놓고 부대끼며 지내야 합니다. 종종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고 의외로 이를 설명하고 항상 이 제약 안에서 시스템을 고안하도록 가이드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MMO 게임을 경험해본 분을 조금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MMO 게임을 꽤 많이 만드는 분위기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MMO 게임은 그저 수많은 장르 중 하나에 불과하고 언제까지나 MMO 게임 경력을 가진 분을 채용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개발하는 게임은 항상 비슷한 모양과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고 그런 게임이 과연 고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MMO 개발경험이 없더라도 적어도 수집형 게임을 개발하며 같은 월드를 공유하지는 않지만 서로 랭킹이나 PvP를 통해서라도 부대끼는 메커닉이 있는 게임을 만들어본 분이라면 긍정적으로 보고 다음 단계로 올려드리곤 하지만 채용에는 다른 분들도 관여하므로 항상 제 의견이 관철되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이렇게 채용을 시도한 분이 면접에서 폭망하는 사고라도 나면 역시 내 생각이 틀린건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요.
상황이 이모양이다 보니 위에서 거칠게 캐주얼 게임으로 분류해버린 경력을 가지고 계신 분들의 이력서가 나타나면 고민에 빠지고 맙니다. 저 역시 더 작은 팀에서 제 생각을 더 많이 실험하고 더 많이 시도한 더 작은 게임을 만들고 싶은 유혹을 마음속에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또 기회가 있어 이 장르의 게임을 만드는데 참여하다가도 또 시간이 흘러 기회가 생기면 다시 국내에서 인기있는 MMO 게임을 만들고싶어하기도 할겁니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자잘한 상황들로 인해 서로 다른 장르 개발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게 커리어패스가 갈려 서로 다른 장르 개발을 시도하기 상당히 어려운 분위기인 점은 그분들께 안타깝고 또 저 자신에게 아쉽습니다.
개발팀에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여러 사람들과 여러 개발경험들이 모여야 고객들에게 의미있는 경험을 줄 수 있는 게임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야 프로젝트를 완수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여전히 우리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분들을 선호하고 이 경향이 채용 과정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어 개인적으로는 이 상황이 갑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