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사이에 음식점의 무인주문기를 사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공공장소에 있는 나쁜 인터페이스에 대한 이야기가 타임라인에 오가고 있었습니다. 패스트푸드 가게에 있는 무인주문기의 어처구니없는 인터페이스에 황당해하다가 이런 기계가 사람들을 차별하는 문제에 앞서 너무 낮은 수준으로 만들어진 것, 그렇게 낮은 수준으로 실제 세상에 굴러나와 사용되는 것 자체도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기계들은 확실히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생긴 것 부터가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키가 이 기계 높이를 편안해할 리가 없으니까요. 당장 거리를 걸어보기만 해도 사람들은 최소한 제가 임의로 삼은 기준 키로부터 머리 한두개씩은 더 크거나 작습니다. 또 대부분 수직으로 서있는 스크린 덕분에 항상 고개를 똑바로 들어야 하고 손을 꽤 넓은 범위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일단 신체조건을 만족한 다음에는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들을 가지고 있으려면 은행에 계좌가 있어야 하고 이동통신사의 서비스를 받고 있어야 합니다. 이 사회적 조건은 만족하기 상당히 까다롭고 이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신체적 조건을 만족한 사람들과 함께 상당히 줄어듭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비전문가가 아무렇게나 만든 인터페이스를 참을 수 있고 내 뒤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압력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빠른시간 안에 학습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주문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방금 크게 세 가지 필터를 이야기했는데 이 필터를 모두 통과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겁니다.
이 기계들은 크게 세 가지. '신체조건', '사회조건', '학습조건'을 만족해야만 주문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신체조건은 위에 이야기한 기계의 물리적인 형태에 따른 조건, 사회조건은 신용카드를 가지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조건, 학습조건은 이 기계의 인터페이스를 이해하고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경험과 이해의 조건입니다. 제 시야에서는 주로 '신체조건'과 '사회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갔습니다. 가령 키가 작거나 큰 사람, 시력이 나쁜 사람,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과 신용카드나 체크카드가 없는 사람이 기계를 사용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런 조건을 어느정도 만족할 것 같은 사람도 무인주문기 사용에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천공항 버스표 예매장치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이 기계는 체크카드를 거절하지만 명확하게 '체크카드를 거절한다'고 말하지 않고 '결제에 실패했다'는 확실하지 않은 응답으로 사용자를 좌절시켰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문제에 대해 뭐라 이야기할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학습조건'을 위주로 잠깐 이야기해볼 작정입니다.
무인주문기는 상당한 학습을 요구합니다. 일단 기존에 사용하던 메뉴판과 근본적으로 다른 인터페이스를 통해 메뉴를 표시합니다. 메뉴판에는 메뉴 그림과 이름이 길게 나열되어 있고 세트메뉴를 선택하거나 구성을 변경하는 옵션은 메뉴 끄트머리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주문과정도 이 메뉴의 생김새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일단 메인메뉴를 고르고 구성을 세트로 할 것인지 결정한 다음 구성을 변경하고 싶으면 변경하고 추가메뉴를 선택하고싶으면 선택합니다. 일단 매장을 이용하는 옵션이 기본값이고 포장하려면 주문 끄트머리에 포장하겠다고 말하는 순서를 따릅니다. 그런데 무인주문기는 이 과정을 근본적으로 뒤섞어놨습니다. 위에 영상을 보면 일단 광고를 표시하고 있고 다짜고짜 맨 뒤에 물어봤던 포장여부를 선택하게 합니다. 그 다음은 메뉴를 상위메뉴와 하위메뉴의 두 단계에 걸쳐 표시합니다. 이전에 이런 메뉴 탐색과 선택 방법은 이 기계를 사용해보기 전까지는 경험한 적이 없었을 겁니다. 또한 현재 과정이 전체 과정 중 어느 단계인지, 앞으로 단계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 수 없어 뒤에서 질문 받을 요소를 앞에서 미리 선택하느라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짧은 시간 안에 해내야 할 뿐 아니라 내 뒤에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면 행동에 압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스크린이 똑바로 서있어 내 선택 과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해야만 하기도 하고요.
이 수많은 학습이 필요한 원인 중 하나는 이 기계가 아마도 거의 아무 고민도 없이 제작자의 사고 흐름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이 무인주문기 이전에 사람에게 말로 주문하는 과정을 딱히 고민하지 않고 메뉴 선택 화면을 만들었을 겁니다. 메뉴가 많으니 두 단계 카테고리로 구분하고 뒤에 옵션 메뉴를 다시 물어볼 것과 관계 없이 처음부터 모든 메뉴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메뉴 하나하나를 추가할 때마다 맨 처음으로 돌려보내는 등 개인의 의식 흐름에 따라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고서는 이런 상태로 만들어지는 것 조차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진 기계와 소프트웨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지도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요.
이전 시대의 액티브엑스 때도 비슷했습니다. 사람들은 보안과 사용성 사이에서 좀더 넓은 범위의 이야기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정작 이 솔루션들의 아주 낮은 완성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일이 무인주문기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큰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만 당장의 고통을 해결해주지는 못해 왔습니다. 가령 당장 보안 프로그램 설치를 요구하는 페이지 자체가 보안 프로그램을 요구하는 제정신으로는 만들기 어려운 괴상한 설계 때문에 받는 고통을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번 무인주문기 문제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손쉽게 차별하는 좀더 높은 수준의 이야기가 당연히 진행되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기계의 어처구니없는 사용성 문제 역시 이야기되어야 하며 후자의 목적은 일단 일이 잘못된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사람들을 덜 고통스럽게 만드는 관점에서 사용성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무인주문기 문제는 크게는 사회적인 개선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작게는 사용성 이야기와 빠른 개선 요구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