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어 서점’을 읽으며 처음 잠깐동안은 얼굴을 굳혔습니다. 언어 임플란트가 인식할 수 없게 하는 패턴을 인쇄해놓은 책. 순간 현대 인터넷에서 흔히 보는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브라우저에서 컨텍스트 메뉴를 여는 동작을 금지하거나 텍스트를 이미지로 올려 이를 참고하려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거나 스크린 리더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빈 공간만을 보여주는 장면을 상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맥락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잠깐동안은 도리어 이 서점의 존재가 언어 인플란트를 장착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이 서점을 제외한 모든 우주를 편안하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전 우주에 그렇지 않은 장소가 하나쯤 있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싶은 생각이 들며 이 만화를 떠올렸습니다.
이 책은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와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의 두 파트로 나뉘어 있습니다. ‘늪지의 소년’은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제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책 표지를 다시 바라보니 그런 제목으로는 책이 잘 안팔릴까 싶었습니다. ‘증명된 사실’의 ‘희박한 환각’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다른 방식의 삶이란 관점에서 가깝게 느낀 이야기였기 때문일 겁니다. 결말은 서로 좀 다른데 희박한 환각에서는 사람이 그 새로운 삶을 받아들였다면 늪지의 소년은 사람이 늪지의 새로운 방식과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 떠납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늪지는 소년의 일부가 됐고 소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소년의 의식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 점이 희박한 환각과 늪지의 소년 사이에 가장 크게 다가오는 차이였습니다. 희박한 환각에 감명을 받아 한동안 밤에 탄천 자전거도로를 달리며 옆에 있는 시꺼먼 물이 나를 덮쳐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한동안 늪을 반달늪으로 봐 왔지만 이제부터는 그 대신 늪이 나에게 혹시나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기대해보기로 했습니다. 잠깐동안만요.
제 입장에서 이 이야기들은 마치 스노우볼 안에 들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스노우볼 안에 들어있는 눈조각처럼 건드릴 수 없는 차원에 있으면서도 건드려보고싶어 그렇게 마음먹으면 어느새 눈조각이 손가락 끝에 닿아있는 그런 느낌. 그냥 휙 읽고 지나간다면 나는 눈조각을 스노우볼 바깥에서 눈으로 볼 수 있겠지만 점심때 조금 읽고 또 조금 생각해본다면 손끝으로 스노우볼 안의 눈조각의 촉감을 느낄 수 있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짧은 나머지 내가 그 앞뒤를 채워나가며 실제 읽은 이야기에 더한 더 많은 이야기를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정신차려보면 그 이야기들은 여전히 책 안의 짧은 이야기로 남아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