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파크라이 6을 클리어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디아블로에서 게임패드를 잡고 길고 지루한 파밍을 반복하다가 지겹고 또 피곤해지면 키보드, 마우스에 기반한 파크라이로 전환하곤 하는데 이 전환이 꽤 효과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화면 중앙의 나와 주변의 몬스터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내게 하는 공격을 피하며 내게 남은 자원, 스킬 쿨타임 따위를 살피며 공격과 방어를 바쁘게 반복해야 했는데 게임이 바뀌고 나면 이번에는 한가롭게 야라 섬을 돌아다니며 아직도 널려 있는 서브퀘스트를 플레이 하며 저 멀리 있는 적을 정찰하고 조용히 숨어 다니며 이들을 조용히 처치하다 보면 두 게임이 신경을 쓰게 만드는 지점이 서로 상당히 달라 나쁘지 않았습니다.
외전을 제외한 전작인 파크라이 5에서는 한참 플레이 한 다음에는 이 세계가 마치 코미디처럼 느껴졌습니다. 미국 중부 어딘가에 있을 지도 모르는 외부와 좀 단절된 깡촌에 세계의 종말에 대비해 핵벙커를 만들어 놓고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는 광신도 집단이 득시글거리는 세계는 지나가다 멍청한 광신도 한 명을 차로 치거나 블리스를 들이마셔 맛이 간 사람에게 총질을 해도 그리 기분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에는 본격적인 광신도들,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 이들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 또 이들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이 구성하는 세계는 어딘지 모르게 나사가 빠져 있어 게임 상에 사람 모양을 한 대상을 게임에서 허용하는 방법을 사용해 괴롭히거나 심지어 죽여도 이 행동 자체가 게임 상에서 일어나는 납득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정계에 입문하기를 원하고 마치 MAGA 모자라도 눌러 쓰고 있을 것 같은 아저씨가 등 뒤에 엽총을 매고 집 앞 코치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아들에게 온갖 잔소리를 해 대고 있거나 멀쩡한 초원에 나타난 곰 때문에 농사를 망치기 직전인 사람들이 주고받는 무전을 듣고 있으면 이 세계에 몰입하긴 하지만 또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편 이번 파크라이 6은 플레이 시간이 늘어나도 뭔가 편안한 기분이 잘 안 들어서 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야라 섬 역시 실제 지명이 있기는 하지만 가상의 세계이고 전작과 비슷하게 독제자가 있고 그를 따르는 그룹이 있으며 이들을 지탱하는 군사조직과 이들에 의해 고통 받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미국 중부 어딘가에 있던 가상의 광신도 조직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파크라이 5에 비해 파크라이 6은 이 상황의 장르를 코미디로 받아들이고 게임 속 세계의 어딘가 나사 빠져 있음에 집중해 세계에 몰입하면서도 감정이 상하지 않던 그 묘한 경계를 넘어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비슷한 설정과 비슷한 시스템의 두 게임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다른 걸까요?
먼저 게임의 최종 보스가 한쪽은 적어도 겉으로는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쪽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존 시드는 종말을 믿고 머지않아 닥쳐 올 종말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함께 종교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일단 이 설정 자체가 현실 세계에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형태로 인식되기 때문에 이 세계의 설정에 몰입하면서도 이 설정이 실제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의해 게임 속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를 오가며 감정을 남겨 다른 세계로 이동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반면 야라를 지배하는 독제 정권은 투표를 통해 선출되었지만 야라 섬의 특산물을 더 많이, 더 빨리 생산하기 위해 주민들을 무작위로 뽑아 강제 노동을 시키기 시작했고 이들을 보호할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설정을 위해 독제자의 잔혹한 면, 고통 받는 사람들, 이들에게 가혹하게 구는 군인들을 보여주는데 집중하는데 이 설정은 이 세계가 가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런 세계와 이런 설정이 실제 세계에 없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세계를 결코 코미디나 가상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파크라이 6에서의 저는 반군에 가담해 독제정권을 위해 일하는 군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무기를 파괴하고 물자를 훔치고 그들이 일하는 시설을 파괴하며 좀 더 이 섬의 반군에 이입해 플레이 하고 있는데 지난번에도 소개한 대로 군인 중 일부는 그저 군대에 소속되어 있을 뿐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해서 제게 돈을 받고 정보를 팔기도 한다는 설정이 있어 무턱대고 군인을 죽인 다음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실제 세계와 야라 사이를 오갈 때 야라는 마치 실제 세계에도 있을 법 한 여러 사건의 집합처럼 느껴져 제가 방금 게임 속에서 한 행동들이 실제 세계의 자신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특히 내게 정보를 팔려고 ‘그 총 치우고 이리 와 봐’라고 했던 한 군인에게 E
키를 누른다는 것이 실수로 F
키를 눌러 마체테로 사람을 썰어 버린 다음에는 ‘아 ㅆ.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말았어’란 생각이 들어 게임이 게임 같이 느껴지지 않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럼에도 이 게임은 곳곳에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웃기게 표현하기 위한 미친 발명가, 정신나간 방송 프로듀서, 수 십 년 전에 한 가닥 하던 레지스탕스 등의 설정 장치를 추가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게임 속 세계가 실제 세계 관점으로 볼 때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게임을 하는 저 자신 역시 그런 현실적인 측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kOCoqKyWPw
한편 이런 설정의 반대쪽 끝에는 GTA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스 산토스는 현실 세계와 너무나 비슷하지만 마치 집 안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나서 집에 나타난 경찰이 ‘존. 다시 일해요?’ 라고 묻거나 집에 로켓을 맞아 집이 전소된 다음에 다시 나타난 경찰이 ‘가스 누출?’ 이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세계를 코미디로 만들려는 듯한 설정이 곳곳에 들어 있습니다. 이 세계 속 사람들은 현실과 비슷하지만 과장돼 있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면서도 아무 대응도 하지 않습니다.
존 윅 세계 속 사람들 역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살인에 어처구니 없이 둔감하고 클러버들은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든 지금 하는 행동에 집중합니다. 이런 표현들이 세계를 실감나게 표현하면서도 그 세계가 사실은 가상 세계이며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 범죄 따위는 이 세계 밖의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의 법칙과는 완전히 다름을 계속해서 플레이어인 저 자신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스 산토스와 실제 세계 사이를 오갈 때는 요즘 야라 섬을 오가며 느끼는 감정상태를 거의 겪지 않습니다.
오히려 GTA에서는 그 세계가 실제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반해 각 주인공들의 기행에 몰입하기도 하는데 평소에는 게임 상에서 민간인에게 총을 쏘는 경험에 눈살을 찌뿌리지만 트레버에 이입해 역에서 사람들을 실어다가 종교집단에 팔아버리기를 반복하거나 좋아하는 가수를 트렁크에 실어 기차에 치이게 해 버리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하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고 또 그 세계를 떠날 때 그 세계 속의 자신과 그가 느낀 감정을 놔두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
결론. 파크라이 6은 전작과 비슷한 세계와 현실성, 사건 전개를 보여주지만 그 세계가 현실 세계와 닮아 있어 마냥 가상 세계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며 게임 속 설정이 이 안에서 벌어질 사건이나 범죄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기에는 지나치게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것들이어서 게임 속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를 오갈 때 감정의 전이가 일어나 게임이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한편 GTA는 현실 세계를 세밀하게 재현하면서도 실제 세계와 기묘하게 다른 여러 장치들을 통해 파크라이에 비해 훨씬 황당하고 무서운 범죄가 일어나면서도 이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를 오갈 때 상대적으로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