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생활

없는 생활’이라는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에서 결혼했지만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결정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 볼 수 있습니다. 항상 메일로만 글을 읽다가 방금 뉴스레터 링크를 가져오면서 알게 됐는데 이전에 즐겁게 읽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의 저자이신 모양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이 고민을 마치고 결정을 내린 다음 나름 평화롭게 살아 가고 있지만 이 고민과 결정을 조금은 덜 심각하게 느꼈을 아조시의 입장에서 가끔 잊어버릴 때가 되면 인박스에 나타나는 이 뉴스레터는 비록 만나본 적 없는 분이지만 남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슬쩍 훔쳐보고 또 우리 가족의 삶에도 살짝 비춰볼 수 있는 재미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글의 제목은 제목 낚시입니다. 이 제목은 지난 C레벨 패닉에서 소개하기로 한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며 마일스톤 마감이나 런칭 직전의 마감에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온갖 괴상한 일이 일어나는 이야기 중 하나를 소개하기에 적당한 제목이라고 생각해서 지었습니다. 그래서 실은 방금 소개한 ‘없는 생활’ 뉴스레터와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뉴스레터는 아주 재미있으니 동영상이 기본인 시대에 아직 까지도 텍스트로 된 뉴스레터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구독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한편 이 글 역시 제 뉴스레터를 통해 구독자 전용으로 올라갈 테니 아직 구독하지 않으신 분들은 화면 오른쪽 아래에 있을 구독 버튼을 클릭해 등록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국내에서 게임 개발 관련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블로그와 뉴스레터는 아주 드문 것 같거든요.

자. 지난 C레벨 패닉에서 마감 기간에 일어나는 온갖 이상한 일에 대해 소개했는데 그 중 하나는 회사의 행정적인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이었습니다. 마감은 주로 회사의 월말 업무와 겹치는데 이유는 마일스톤 기간을 주로 월 단위로 계획하기 때문입니다. 규모가 큰 게임을 만드는 팀에서는 마일스톤을 3개월 혹은 4개월로 설정하곤 했는데 마일스톤 길이가 월 단위이므로 마일스톤 마감 날짜는 항상 월말이었습니다. 규모가 조금 더 작은 모바일 게임 팀에서는 마일스톤을 항상 2개월로 설정해 그야말로 정신 없이 개발해야만 했는데 이 때도 마일스톤 마감 날짜는 변함 없이 월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월말은 회사에서도 바쁜 일이 일어나는 때입니다. 가령 월말에는 직원들에게 급여를 줘야 하고 회사를 운영하기 위한 온갖 대금 집행도 월말에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오피스 임차 비용을 지불하거나 다른 회사에 외주 비용을 지불하거나 법인카드 이용대금을 지불하는 일도 주로 월말에 일어납니다.

그렇다 보니 종종 회사의 월간 행정 경계선과 우리들의 마감이 겹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번에 겪은 일은 회사 법인카드 한도와 대금 납부 기간, 그리고 우리들의 마감이 비슷한 시간대에 겹쳐 있어 평소 같으면 그냥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게 우리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전 팀 전체가 참여한 빌드 테스트를 마치고 여기서 발견한 결함을 모아 둔 지라 에픽은 앞으로 마감까지 남은 시간 동안 우리들이 해야 할 업무 목록입니다. 우리들은 평소에도 거의 모든 업무를 지라를 통해 기록하고 공유하고 또 진행하고 마무리해 왔습니다.

팀 규모가 커지고 또 팀이 개발해 내야 할 소프트웨어의 규모와 복잡도가 늘어나면서 업무 수행을 기록하는 이런 소프트웨어의 도움 없이는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이 일들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 이 모든 일이 모여 목표에 잘 다가가고 있는지 지라 없이는 사실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록을 새로고침하자 갑자기 태스크 목록 대신 다른 메시지가 나타납니다.

오 신이시여.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얼마 남지 않은 고객 대상 빌드 공개를 앞두고 온갖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관리해 가며 다들 거의 지라만 쳐다보며 정신 없이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라가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메시지를 토해 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처음으로 ‘어?’ 라고 말했고 이 화면은 순식간에 팀 전체에 퍼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침착하게 읽은 메시지는 대략 ‘늬들 돈을 안냈잖니. 그래서 서비스를 끊었단다’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문의해 보니 아틀라시안에 지라 이용요금을 납부하는 법인카드 한도가 초과되어 요금이 납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같은 회사의 컨플루언스를 사용하면서 신용카드를 재발급 해 이전 카드를 통한 결제에 실패할 때 결제에 실패하��� 마자 바로 이런 화면을 띄우지는 않았습니다. 결제를 여러 번 시도하고 또 실패 사실을 메일을 통해 여러 번 며칠에 걸쳐 보내 오는데 이 모든 과정이 지난 다음에야 서비스가 중단됩니다. 실제로 카드 결제에 실패한 적이 있지만 서비스 중단까지 이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며칠 동안이나 여러 번 연락해 오거든요. 그러니까 이 모든 과정이 일어나는 동안 아무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순식간에 멍해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 다음에 무슨 일을 이어서 해야 할 지는 전혀 알 수 없게 됐기 때문입니다. 일단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 시키며 결함을 수정하고 무사히 테스트를 마친 다음 형상관리도구에 커밋하려고 하는 순간 커밋 메시지에 포함할 지라 이슈키가 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형상관리도구에 커밋 할 때 메시지에 지라 이슈키를 넣어 두면 나중에 지라 태스크에서 어떤 커밋에 의해 이 태스크가 수행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어 굉장히 편리한데 지라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멀쩡히 동작하는 형상관리도구에 커밋 메시지를 작성할 수 없게 된 겁니다. 그렇다고 결함을 수정했는데 이를 커밋 하지 않고 있을 수도 없어 부득이하게 지라 이슈키 없이 메시지를 작성한 다음 커밋했고 풀리퀘스트를 마치자 이제 메시지를 수정할 수도 없게 됐습니다.

찜찜한 기분을 뒤로 하고 저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은 이제 이어서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일을 작게 조각 낸 다음 그 하나에 집중하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지라가 사라지자 지금 수행하던 그 일 하나에는 끝까지 집중할 수 있었지만 그 다음 일을 선택할 순간이 되자 완전 바보가 되어 버렸습니다. 계속해서 요금 결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페이지를 새로고침 하며 ‘나 이제 뭐함?’이라고 중얼거렸는데 정말로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전체적인 업무 맥락은 빌드 테스트를 거쳐 나온 수많은 결함 중 저에게 할당된 것을 직접 수정하거나 수정에 필요한 의사결정을 하거나 결함을 수정해야 할 적당한 사람에게 태스크를 할당하는 등 결함을 수정하는 것이었는데 지라가 없어지자 그 모든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집에 갈 수도 없으니 회사가 이 상황을 해결해 주는 동안 지라 ‘없는 생활’을 시작합니다. 일단 그 동안 다른 업무를 수행하며 남긴 메모들을 살펴보며 다음에 이어서 할 일에 대한 힌트를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생각의 멱살에서 소개한 업무 수행 방법 덕분에 지금까지 수행한 업무에 대한 아주 많은 분량의 기록이 남아 있었고 그 기록에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힌트가 수 없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만 지라에는 그런 힌트가 우선순위에 따른 업무 목록 모양으로 등록되어 있는 반면 업무 기록은 비록 분량이 많고 또 자세하며 업무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그들 각각이 얼마나 더 중요하고 또 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거의 힌트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지라에 있던 전체 결함 목록에서 본 기억이 나는 결함들을 업무 기록으로부터 찾아냈고 이들을 고치며 지라가 돌아올 ��까지 ‘없는 생활’을 견디기로 합니다. 일단 할 일을 결정하자 지라가 없는 상태는 다시 크게 인식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지라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될 시점에 그때까지의 업무 진행을 기록하기는 해야 했으므로 지라가 복구되는 시점을 정확히 알기 위해, 또 도대체 개발팀에 지라가 안되다니 이게 대체 무슨 황당한 사태냐는 항의를 위해 세 번째 모니터에 지라 웹사이트를 띄워 놓고 2초에 한 번씩 새로고침하게 만들어 전체화면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회사에서 지라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안내해 주겠다고 했지만 분명히 그 안내보다 제가 더 빨리 알 수 있을 겁니다.

일을 맨 처음 시작할 때는 지라 같은 이슈트래커를 필수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첫 프로젝트에서 그랬는데 이 때는 심지어 형상관리도구 사용 역시 선택적으로 고려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개개인이 열심히 일하더라도 이들 사이가 잘 연결되지 않아 전체적인 업무 진행은 더뎠는데 심지어 그 더딘 상황 자체가 모두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위험하기까지 했는데 프로젝트 리더십은 이런 문제가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잘 몰랐고 팀에 PM을 고용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충분히 흐른 지금에 와서야 이야기하면 그 PM은 그 이후에 만난 그 어떤 PM보다도 무능력했는데 온갖 사건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C레벨 패닉에서 소개한 고위 의사결정자마냥 주요 목표에 대한 진행상황을 이따금씩 확인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여기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예상해셨겠지만 PM의 고용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팀은 드디어 처음으로 이슈트래커 소프트웨어를 도입하려고 시도하는데 이 때 도입한 것은 trac이었습니다. 이슈트래커와 위키를 묶어 제공했는데 PM은 팀이 이 소프트웨어에 순식간에 적응해 팀이 처한 온갖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사람들은 시큰둥했고 처음 보는 관리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잘 몰랐습니다. 이 관리 소프트웨어의 운용 방법 가이드라인은 당연히 없었고 상당수 사람들은 그것이 회사의 임무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회사로부터 자기 업무를 감시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이유로 이 소프트웨어 사용을 꺼리기도 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이 소프트웨어에는 위키가 함께 제공되었는데 이 때 까지는 기획서를 워드로 작성하던 시대여서 형상관리도구 사용이 선택적이었던 상황과 합쳐져 기획서 최신 버전을 입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팀 전체는 갑작스레 워드 대신 위키에 기획서를 작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 역시 잘 동작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문서를 ‘시각적’으로 작성하는데는 익숙했지만 위키 스타일의 ‘의미 기반’ 문서를 작성하는데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고 이런 개념의 차이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위키에서 ‘글자 색깔’이나 ‘글자 크기’를 원하는 대로 조정하지 못하거나 그림을 원하는 위치에 삽입하지 못하자 이 특징에 분노하며 기획서 페이지에 워드 파일을 덩그러니 첨부해 저항하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업계 전체가 이런 난리를 겪으며 서서히 이런 관리 체계에 익숙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체계는 결국 우리들의 한정된 두뇌의 총합을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그리 똑똑하지 않은 개개인들의 부족함을 지원해 결과적으로 우리들 모두가 관리되지 않던 이전 시대에 비해 더 많은 일을 더 짧은 기간 안에 더 정확히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현대에도 여전히 이런 관리 체계를 잘 사용하지 않는 분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 업을 오래 해 온 분들일수록 이 관리 체계 없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우리들은 지라가 사라지자 모두가 패닉에 빠진 겁니다. 결국 지라 다운타임 동안 몇몇은 회사 근처 카페에 뭔가를 마시러 나갔고 몇몇은 하던 일 한 가지에 집중했으며 또 다른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서성이며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 퇴근 시간에 맞춰 지라에 다시 접근할 수 있게 됐지만 다시 나타난 결함 목록을 살펴보던 사람들 대부분은 한숨을 푹 쉬고는 ‘아 몰라! 내일 할래!' 하며 주섬주섬 짐을 챙겨 회사를 떠났습니다. 일을 처음 시작하던 시대에는 확실히 우리들은 좀 더 대책 없이 일했고 소프트웨어 개발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형상관리도구 없이, 이슈트래커 없이 일할 무모한 생각을 하고 또 그게 얼마나 무모한 생각인지조차 몰랐던 겁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우리는 이런 도구가 이 도구 제작사에 매달 지불하는 금액보다도 훨씬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때 이런 관리 도구를 도입하는데 저항하던 사람들조차도 이제 지라 다운타임 동안 이게 뭐냐고 불평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결론. 현대 소프트웨어 개발팀은 지라 없는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