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제도에서 웃음기를 뺀 에스크로
실은 언젠가 부터 뉴스를 잘 안 보기 시작했습니다. 뉴스를 볼 때마다 힘든 느낌이 들었는데 그렇다고 뉴스 보기를 멈추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뉴스를 통해 접한 누군가가 겪은 사건 사고나 어떤 높은 분들이 내린 결정은 좁디 좁은 세상을 건너 제게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고 그럴 생각을 할 때마다 그런 뉴스를 견디고 있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얼마 동안 뉴스를 멀리 하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았지만 실천하지는 못하다가 뉴스를 전해 듣는 매체 중 하나였던 트위터를 일론님이 구입한 다음부터 그리 어렵지 않게, 또 고통스럽지 않게, 그리고 꽤 자연스럽게 트위터와 조금 거리를 두며 뉴스와도 조금 거리를 두게 됐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이전에는 보기 쉽지 않았던 소식을 이전과 달리 약간 다른 사람들 이야기처럼, 마치 이 좁디 좁은 세상을 건너 제게 도달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 글을 타이핑하고 있는 2023년 봄 어느 날 타임라인을 훑다가 국토교통부 장관님이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전세 사기 사건 대책으로 전세금을 에스크로에 넣어 뒀다가 전세 기간이 끝나면 안전하게 세입자에게 돌려주는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실은 링크를 눌러 정확한 글을 읽지도 않았습니다. 실은 이미 링크를 눌러 읽은 글에도 제대로 된 상황 설명과 어디 까지가 장관님의 이야기이고 아닌지, 또 어디까지가 실제 법률화될 규칙이고 어디 까지가 아닌지 제대로 설명되어있지 않으리라는 그 글을 작성했을 기자에 대한 깊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핵심은 전세 사기로 돈을 잃는 피해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고 국토부 장관님이 생각하는 해결 방법의 핵심은 돈이 잠재적 피해자의 의지에 반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데 집중되어 있다는 데 있으며 법률화 이전에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여기까지 생각한 다음에는 좀 웃겼는데 그냥 대강 생각해도 제대로 동작하는 근처의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 같은 거의 아무말에 가까운 말이 높은 분 입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기사로 만들어져 인터넷을 떠돌며 귀중한 트래픽을 낭비하고 있는 모습이 웃긴 감정 말고는 다른 감정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직관적으로 정책을 말한 사람은 전세제도의 역사나 전세제도가 근본적으로 무엇이고 또 실질적으로 어떻게 동작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이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저런 이야기를 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동을 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는 전자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갑자기 그냥 검색해보면 나올 전세제도에 대해 읊을 생각은 없습니다. 전세제도의 근본적인 동작 원리는 집주인이 거주 권한을 빌려주고 그 댓가로 이자 없이 돈을 받는 대출 상품이라는 시각에 동의한다면 굳이 전세제도에 대해 찾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집주인이 세입자로부터 대출 받은 전세금을 다시 그 집을 구입하는데 사용할 때 만약 집의 시장 가치가 전세금 아래로 떨어지면 다시 그 집을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실행하거나 그 집의 거주 권한을 빌려주고 다른 세입자로부터 대출을 실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대출금을 반환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이를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설계했다면 전세 사기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여기까지 따라오셨다면 집주인이 세입자로부터 대출 받은 돈을 세입자가 다시 돌려 받지 못하는 사고를 막기 위해 에스크로를 통하는 발상이 왜 이상하고 웃긴지 알 수 있습니다. 에스크로를 대강 생각해 보면 어떤 물건이나 권리 이양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전까지 신뢰할 수 있는 제 삼자가 돈을 가지고 있다가 이양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한 다음 이전 보유자에게 돈을 넘기는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물건이나 권리가 완전히 이양될 경우에 에스크로가 동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세 제도는 거주 권리를 일정 기간 동안 이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에서 설명했다 시피 근본적으로 대출이기 때문에 거주 권리 이양이 완료될 때 까지 에스크로가 돈을 가지고 있으면 대출로써 동작하지 않게 됩니다.
에스크로가 세입자의 돈을 온전히 지키려면 2년짜리 전세 계약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집주인 입장에서는 거주 권리를 대여했지만 2년 동안 아무 것도 못 받고 있다가 2년이 지나면 에스크로가 세입자에게 안전하게 돈을 돌려주는 이상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세 제도가 근본적으로 대출이기 때문에 대출 상황에서 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은 에스크로가 아니라 보험이고 앞에서 설명한 의도적인 전세금 미반환 사건 혹은 전세사기사건의 피해자는 세입자일 뿐 아니라 보증보험사이기도 합니다.
자. 그런데 지금까지는 국토부 장관님이 전세제도의 근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한 말을 했다는 가정 하게 이야기를 해 왔지만 지금부터는 한동안 여러 게임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겪은 일들을 떠올려 보며 저런 생각과 발언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왜 그게 가능하고 또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지 국토부 장관님의 입장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빠른 태세 전환에 놀라셨을 수도 있는데 까놓고 이야기하면 상황의 근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상황 자체만 보고 겉으로 드러난 문제에만 집중해 해결 방법을 찾으려고 하면 당연히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경험치 곡선을 만들어낼 때 했던 실수에서 소개한 적 있는 얕은 생각에 근거한 잘못된 문제 해결 방법은 그걸 실행하던 우리들에게는 당장 뭔가 대책을 수립해 실행하고 있다는 얕고 짧은 만족감을 줬지만 당연히 이 방법으로는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좀 더 근본적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더 깊은 생각과 더 많은 자원 투입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짧은 생각 끝에 차라리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보다 못한 대책을 세워 잠을 못 자 가며 패치를 준비해 실행했고 결국 고객들로부터 욕을 먹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국토부 장관님의 전세 사기 대응 방안으로 나온 에스크로 이야기를 지켜 보며 잠깐 동안은 웃겼고 또 잠깐 동안은 저 발언이 저렇게 믿기 때문에 한 말일지 아니면 저렇게 말할 고도의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일지 고민했으며 그 다음에는 과거에 한 경험에 따라 눈 앞에 보이는 상황에만 집중한 아주 얕고 짧은 생각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저 발언이 어떤 고도의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저런 발언은 장관님이 아니더라도 눈 앞의 상황만 본 채 짧고 얕게 생각하는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깐 동안은 낄낄거리다가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고 다른 뉴스를 대하듯 마치 저 소식이 세상을 건너 저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 다음 그저 거울을 들여다 보고 ‘나나 잘 하자’는 생각을 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