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한동안 계속해서 구인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가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빠르게 확장해야 합니다. 맨바닥부터 개발하기 시작해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추면 이제 본격적으로 기반 위에 컨텐츠를 쌓아올리고 한편으로는 아직 조금 이를 수 있는 런칭 준비를 해야 합니다. 런칭은 어처구니없이 높은 완성도를 요구합니다. 테슬라처럼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지 않는 우리들은 문짝이 잘 안 맞는 상태로는 런칭 근처에도 갈 수가 없습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업을 해야 하고 당장 사람들을 채용해서 이 거대한 완성도에 맞설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런 시점에는 많은 주니어님들과 적은 시니어님들을 구인합니다. 주니어님들께 게임 컨텐츠를 크게 확장하고 방대한 게임 구석구석의 완성도를 올릴 임무를 맡깁니다. 시니어님들께는 이 확장과 완성도 업무를 지휘하고 각각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맡기게 됩니다. 주니어와 시니어를 구분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또 이런 연차에 따른 구분이 요즘 세상에 잘 맞지는 않습니다. 편의상 오래된 직급 체계를 기준으로 이야기하면 대강 대리급까지는 주니어로 보고 과장급부터는 시니어의 초입에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보곤 합니다. 확장에는 이들 양쪽 모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시니어님들이 제출해 주신 이력서를 살펴보며 몇 가지 느낀 점이 있습니다. 저 역시 이제부터 적는 아쉬움을 피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감사하게도 회사에 고용되어 프로젝트에 기여하고 있어 당장 저를 시장에 노출시키지 않아도 되지만 모두들 잘 알고 계신 대로 언제 갑작스럽게 시장에 내던져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아쉬운 점들은 미래에 스스로를 시장에 노출시킬 때2)를 맞이할 저 자신을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업계에서 긴 시간 동안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어쨌든 업무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례를 보면 어떻게 이런 수준으로 살아남아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시장에서 업무능력을 검증받는데 실패하면 시장에 살아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아주 가난한 프로젝트에 고용되어 간신히 숨만 쉬며 먹고사는 수준에 머무르든지요. 그래서 위에서도 기간에 따른 주니어와 시니어의 구분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쨌든 일정 수준 이상의 프로젝트에 고용되어 긴 기간 살아남았다면 그게 업무능력이든 정치적인 면이든 뭐든지간에 살아남을만한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연차를 쌓고 나면 업무능력만으로는 충분한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연차가 쌓임에 따라 업무능력이 올라 프로젝트에 개인이 기여할 수 있는 한계를 맞이하면 그 다음부터는 개인으로써 업무능력을 갈고닦아도 더이상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수준을 끌어올릴 수 없게 됩니다. 여기부터는 나를 포함한 주변의 다른 개인들에게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업무능력 이외에 업무 맥락을 파악하고 더 넓은 시야로부터 비롯된 인사이트가 필요합니다. 프로젝트 구성원 개인들은 게임 구석구석을 훑으며 완성도를 올릴 온갖 방법을 찾아 실행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시야는 좁아지고 한 발 물러나서 보면 생각보다 간단한 일에 매몰되어 고통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 수준을 넘어 프로젝트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개개인이 하루하루 업무 수행을 위해 가질 수밖에 없는 시야와 맥락 파악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도움에는 반드시 더 넓은 시야에 의한 인사이트가 필요합니다.

시니어의 서류에 이런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 문서는 지독하게 평이해지고 맙니다. 맡은 일을 훌륭하게 수행해낼 수 있음은 물론 그 자체고 훌륭하기는 하지만 이 분을 시니어로써 구인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또 이분을 채용한다 하더라도 이 분을 시니어로써 대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시니어 이상의 연차로써 시장에 자신을 노출시켜야 한다면 업무능력 이외의 뭔가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업무 각각의 맥락을 이해하고 업무 자체의 목표 뿐 아니라 업무 자체가 충분히 표현하고 있지 않은 그 바깥의 목적을 달성하는데도 기여해야 합니다. 또 목표를 방해하는 이상한 업무에 의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를 어필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시니어로 인지되지 않을 겁니다.

흔히 경력자 구인은 자기소개서보다는 경력기술서가 더 의미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현대에 모국어가 한국어이면서도 한국어를 충분히 잘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려움을 겪다 보면 자기소개서가 자기소개 이상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소개서는 좀 딱딱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자신이 평균 이상의 한국어 구사능력을 갖추고 생각한 바를 조리있게 글로 표현할 수 있으며 자기소개서라는 좁은 시야를 벗어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어필할 훌륭한 기회입니다. 만약 주니어님들의 자기소개서라면 '일남일녀의 장남으로 태어나…'로 시작하는 자기소개서를 웃으며 넘어갈 수 있지만 시니어의 자기소개서에 전통적인 의미의 진짜 자기소개를 하면 안됩니다. 시니어의 자기소개서는 자유 주제 에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적당합니다.

솔직히 시니어를 지인찬스 없이 구인하려는 시도는 투입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처참하게 실패하는 중입니다. 구인을 꿈꾸는 시니어들은 이미 어딘가에 단단히 고용되어 있어 시장에 나타나지 않고 지인찬스를 통과하는 시니어들은 아주 잠깐 동안만 시장에 나타날 뿐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순식간에 다른 프로젝트로 사라져버립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시니어들을 구인해 보려고 하지만 위에 이야기한 여러 가지 아쉬움으로 채용을 결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런칭을 위해 확장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고 여기서 구인의 실패는 프로젝트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시니어로써 구직하실 때 이런 점들을 조금 고려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다음번 시장에 나타날 때 이 점들을 신경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