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인형에 대한 부연
게임 기획자의 일이라는 책에 인터뷰로 참여했습니다. 업계에 긴 시간 동안 살아남은 베테랑 기획자 남박사님의 업계 바깥에 있는 분들께 이 일을 재미있게 설명한 책입니다. 세상에 남의 돈을 버는 이상 어렵지 않은 일이 없을 겁니다. 이 일도 마찬가지인데요, 매운 맛은 잘 빼고 감칠맛만 남겨 빠르고 재미있게 이 일에 대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중간 중간에 오랜 시간 업계에 계신 분들의 인터뷰도 끼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내 세상이 좁아질 때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계속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살아남았다고 하긴 그렇고 그냥 일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는 바람에 인터뷰를 하긴 했는데 분명 수록 하자니 애매하고 뺄 수도 없어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책 맨 끝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이건 개그입니다! 책 맨 뒤에 배치하신 이유에 대해 전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싶습니다. 인터뷰 이후 시간이 꽤 지나 문장을 다시 읽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가 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제가 쓴 글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낯선 기분이 드는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책이 출간된 이후 저자님으로부터 인터뷰에 말한 ‘곰인형’이 맥거핀스럽다는 반응이 있었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곰인형의 의미를 잘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곰인형이라고 말하면 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곰인형에 대해 부연 하려고 합니다.
제게 곰인형은 제 혼잣말을 들어주고 제 머릿속에 직접 말하는 존재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곰인형을 안고 있으면 마음이 진정될 뿐 아니라 어려운 일을 해결해 나갈 실마리를 얻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곰인형에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곰인형은 항상 나를 환대해 주고 입이 무거워 내가 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또 곰인형은 참을성이 있어 내가 두서 없이 이야기해도 내 말을 중간에 가로막지 않고 끝까지 들어줍니다. 곰인형은 내 말을 듣고 생각해본 다음 정리해서 제게 다시 말해줍니다. 다른 사람이 함부로 들을 수 없도록 내 머릿속에 직접 이야기해 줍니다. 곰인형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얽힌 상황이 정리되고 내가 취할 다음 행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곰인형이 내 머릿속에 본인 생각을 직접 이야기해 줬기 때문입니다.
팀에서 곰인형 역할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겁니다. 간단한 일입니다. 그냥 듣고만 있으면 되거든요. 가끔 맞장구치거나 흥분한 나머지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한다면 빠르게 마땅한 단어를 찾아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하면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주체는 제가 아니라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제가 아닙니다. 때문에 저는 이야기를 듣고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이 막혔을 때 이어갈 단어를 찾아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듣고 약간 다른 시각을 제시해 보거나 이야기를 정리해 다시 들려줄 수 있을 뿐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는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이야기하다 보면 스스로 답을 얻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하는 일은 오직 곰인형 역할입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 다만 여기서 어려운 일은 제가 곰인형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팀에 인식 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곰인형이라고 광고해서는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이건 여전한 고민거리입니다.
생각해보니 곰인형이라는 비유가 바로 통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동양권에서는 대나무숲이 설명 없이 더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다만 대나무숲은 의인화된 대상으로 표현하기는 좀 어색하니까 그대로 곰인형이라고 말하고 다닐 작정입니다. 다만 앞으로 이렇게 설명할 때는 항상 곰인형에 대해 약간 부연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