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실제로 하는 일
사례 1
팀에 갓 졸업한 0년차 신입분이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난감했습니다. 고만고만한 게임회사 대부분은 교육과정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눈치껏 알아서 잘 하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새로 오신 분의 지식수준이 어느정도인지도 모르고 게임 경험을 얼마나 가지고 계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 업무지시를 해야 할 지, 어떤 업무부터 드려야 할 지, 또 어느정도의 결과물을 기대해야 할 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별도로 교육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없으니 업무수준을 조절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학교에서 어떤 커리큘럼을 가르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는 게임 개발을 가르치는 곳이었는데 개발직군을 대략 아트, 프로그램, 게임디자인 정도로 구분하는 것 같았습니다. 게임디자인은 기초과정을 배운 다음 학교 내 사람들끼리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모양입니다. 팀 프로젝트 중심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회사와 계약에 의해 모인 사람들끼리 개발하는 것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돈도 안 받는 사람들이 모여 하는 팀 프로젝트라니 대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은 게임디자인 직군이 읽어야 하는 책이나 공부하는 과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요약하면 게임디자인 직군이 학교에서 이수해야 하는 과목 거의 대부분은 실제 개발팀에서 최상위 의사결정권자에게 주로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가령 재미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을까, 또 게임 메커닉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상황에 따라 어떤 메커닉을 사용해야 할까 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 프로젝트에서 일을 시작하면 이런 배경지식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일을 하게 됩니다. 가령 엑셀 파일을 편집해 이미지를 갈아끼운다거나 기존에는 목록과 실행 화면을 오가야 하던 영웅합성 기능을 한 화면에서 진행할 수 있게 한다거한 하는 것들입니다. 이 일에 근본적인 재미에 대한 고찰은 큰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사례 2
온라인에 여러 게임을 개발하는 분들의 말씀을 읽어보면 양산형 게임 개발에 대한 불만, 두려움, 업신여김 같은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유저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요. 마치 우리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거나 만약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지 않아야 할 것만 같은 느런 느낌입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개발자들 중 누구도 자신이 이른바 양산형 게임을 만들고 있다고 잘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상당히 다릅니다. 양산형이 아닌 소위 갓겜을 만들어내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양산형 게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양산형 게임을 만드는 일은 사실 그들의 능력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개발회사의 상위 의사결정자나 퍼블리셔가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게임이 소위 양산형 게임이고 우리가 회사와 계약한 이상 양산형 게임을 만드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습니다. 종종 양산형 게임을 만드는 사이사이에 자신의 의지를 밀어넣어보려고 노력한다는 분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 결과가 양산형 게임과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실제로 하는 일
이제 게임디자이너인 우리들이 실제로 하는 일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보 디자이너에게 당연히 재미의 근원에 대한 고찰 경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실제 프로젝트에서 당장 시작하게 될 일은 그와는 몇 광년이나 떨어진 머나먼 일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미리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개발자와 유저에 구분 없이 모두가 경멸에마지않는 양산형 게임 개발은 사실 우리들 거의 모두가 하고 있고 회사와 계약한 이상 이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 일을 제대로 해내야만 한다는 점 또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실제로 하는 일을 좀 더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