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회사에 가면 잘 다듬어진 시스템이 있을까?

언젠가 한번은 프로젝트에 속한 다른 팀 스탭님 한 분을 잃으면서 흥미로운 의견을 들었습니다. 자신은 작은 회사에서 임기응변에 기반해 일하기보다는 보다 큰 조직에 속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절차에 따르며 일하고 싶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우리가 일하던 방식은 체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초기에 제대로 결정된 것이 없었고 우리는 외부 상황과 희미한 비전에 따라 그때그때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요구사항을 정의할 책임이 있는 기획팀 역시 허우적 대고 있었습니다. 요구사항은 자주 바뀌었고 작업 진행에 필요한 가이드라인도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기획은 팀에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니어 스탭인 이 분과 얼마 동안 일하면서 몇 가지 새로운 고민을 해야 했는데 그 고민에 의한 대응이 올바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모두 제 기억과 기록에 기반한 것입니다. 분명 저를 실제보다 더 크게 그리고 있을 겁니다.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일 해 오면서 관리자의 승인 단계를 거치는데 그리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팀원으로 팀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저는 독자적으로 제 의지에 따라 일했습니다. 제가 작성한 문서, 제가 하는 일, 제가 전달하는 업무 요청 등을 잠깐 동안은 관리자의 승인을 거쳤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관리자의 승인 단계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쩌다 자잘하게 관리자의 의도와 어긋나는 부분들이 생겼지만 이는 협업부서와 서로 수정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제시한 가이드라인 전부에 대해 항상 최고 책임자의 승인을 받았는지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 기준에서 팀의 최고 책임자는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세부사항을 잘 챙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제 기준에서 최고 책임자는 그 분의 위치에 맞는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스스로 관심 있는 부분의 디테일에 관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 하나하나의 의사결정을 최고 책임자를 거치기를 원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고 의도를 잘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제 기준에서 지금 이야기하는 결정사항을 곧이 곧대로 가져가 승인을 받는 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체로 이 요구를 무시했지만 항상 이렇게 행동하면 신뢰가 깨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쩌다 좀 더 추상적인 주제가 나타나면 이걸 최고 책임자에게 올려 보내 의사 결정을 받아다 전달하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제 선에서 하는 의사결정의 이유와 이 결정이 전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벗어나지 않으며 이치에도 맞음을 설명해 항상 책임자의 확인을 요구 받는 상황을 완화할 수 있었습니다.

재작업에 상당히 민감하게 대응하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팀원분들께 재작업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주문하곤 합니다. 게임 프로젝트는 요구사항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발을 진행하며 개발 과정에서 여러 실험에 따라 요구사항이 뚜렷해지는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게임 프로젝트 역시 처음부터 뚜렷한 요구사항을 기반으로 개발한다면 우리는 개발팀을 직접 꾸릴 필요가 없습니다. 뚜렷한 요구사항에 기반해 완전한 명세서를 제시하고 개발 전체를 회사 밖에서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이미 우리가 수행한 업무에 해당하는 댓가는 이 일을 다시 한다 하더라도 이미 급여를 통해 지불 받았다는 점은 변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 재작업을 통해 이전보다 더 잘 할 기회를 얻고 또 이전 작업의 교훈을 통해 이전보다 더 나은 개개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 버려질 때 상처 입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이런 상황들로부터 상처를 조금 덜 입도록 가이드하는 것일 뿐이기는 합니다.

시니어분들께는 이런 가이드를 잘 드리지 않습니다. 이미 재작업에 어느 정도 단련 되었을 것을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재작업을 해야 하는 의사결정이 일어난 원인, 새로운 목표를 설명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협업 부서와 충분한 교감 없이 독자적으로 상당한 시일에 걸쳐 진행한 작업이 나중의 의사결정에 의해 재작업 하게 되었을 때 강한 문제 제기를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주니어님들로부터 문제제기였다면 위에 설명한 내용을 처음부터 천천히, 친절하게, 설명했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는 주니어가 아니었고 이런 문제 제기가 일어나는 상황 자체를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성질대로 버럭 할 수는 없으니 게임 프로젝트를 개발하며 이런 상황은 그리 이상하지 않으며 희미한 요구사항을 확실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일임을 적당히 설명했습니다. 이 설명이 잘 받아 들여지지 않았음은 이후 높은 분들로부터 돌아온 피드백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재작업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체계적인 업무 진행과 잘 정의된 프로세스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을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버럭 직전까지 갔던 재작업 사건 후 체계적 업무 진행과 잘 정의된 프로세스에 대한 의견을 듣고 잠시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강경화 전 장관님의 어느 인터뷰에서 상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상대의 말에 숨은 속 뜻을 찾기 시작하면 고통스러워질 뿐이라고 하는데 공감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실은 극동아시아의 고맥락 사회에서 성장한 특성 상 어쩔 수 없이 잠깐이나마 말의 뉘앙스로부터 속뜻을 느낀 것도 같았지만 최대한 이를 무시하고 체계적인 업무 진행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협업 부서들은 기획팀으로부터 잘 정의된 요구사항과 변하지 않는 목표, 필요할 때 빠르게 실행되는 의사결정, 이들을 잘 반영한 문서와 각 부서의 진행상황 공유 등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초기에 이들을 기획팀 혼자 잘 수행하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목표들은 기획팀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만약 기획팀으로부터 이들을 받아 신뢰한다면 여기 맞춰 작업하며 의문을 가지면 안됩니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면 체계적인 업무 진행과 잘 정리된 프로세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신뢰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요구사항 앞에서 정직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기획팀은 모든 협업 부서에 업무 요청을 하는 입장이지만 독자적으로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으며 요구사항과 업무 진행 방법, 결과물의 수준과 이들이 조립된 결과를 판단하는 시점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협업 부서 구성원들의 지식과 경험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말만 듣고 그대로 수행해 가며 따라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잘 실행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협업 부서 구성원 분들의 지식과 경험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굳이 꾸미지 않고 기획팀의 한계를 설명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사이에 이 스탭님의 요구가 잘 충족되지 않았고 결국 이 분을 팀을 떠나는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함께 잘 일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개발에 대한 순진한 관점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주니어를 벗어났다면 본인이 원하는 업무 진행 방식을 주장하고 직접 구축해 실행하고 시행착오에 따라 수정해 나가는 과정을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어떤 조직에도 초반부터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업무 진행이나 잘 정의된 프로세스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개발팀 전체가 시행착오를 통해 직접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행착오 기간이 짧거나 긴 차이 정도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 스탭님은 더 크고 잘 정돈된 조직에서 익숙한 스타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을까요. 부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다음 만나 비싼 밥을 사며 노하우를 묻고 싶습니다. 지금의 저는 아직 시작부터 그럴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