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만 마무리하고 집에 가주세요
정확한 원인을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함께 일하는 우리들 상당수가 일정을 실제보다 훨씬 낙관적으로 추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정을 추정할 때 일이 가장 잘 풀리는 상황을 상상하는게 아닐까 싶어요. 일단 저는 확실히 그런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무슨 기획서를 쓸 때 이전부터 머릿속으로 한참을 생각하다가 실제로 위키 페이지를 열고 타이핑하기 시작해서 문서 초안을 마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습니다. 그래서 기획서를 작성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추측할 때 이 실제로 문서를 작성하는 시간을 일정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체 소요기간은 내가 실제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해 문서를 마무리하는 시간 이외에도 머릿속에서 주제를 기억하고 길을 걷다가, 화장실에 가다가, 네스프레소 머신 앞에서 커피가 내려지기를 기다리다가, 내가 필요 없어보이는 회의에서 멍때리다가 생각하는 시간도 모두 일정에 포함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일정을 추정할 때 이 시간을 모두 당당히 포함시키지 않고 일정을 조금씩 부족하게 계획하곤 합니다.
이런 일정 추정의 실패는 초과근무를 만들어냅니다. 일정을 준수하는 것은 강한 협업이 필요한 개발과정에서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한 사람이 한 마일스톤 안에 진행되는 여러 가지 일에 연관되어 있으면 일정을 지키는 일은 이 아수라장 속에서 그나마 질서를 조금이라도 유지하는 아주 적은 수의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너무 착한 팀원들은 자발적인 초과근무를 시작합니다. 사실 이걸 자발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한 협업을 강요하는 환경에서 잘못 추정된 일정을 준수하는 압력을 받는 것은 자발적이라고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초과근무는 일정 추정을 반복해도 정확도를 올리기 어렵게 만듭니다. 지난 마일스톤에서 이 정도로 일정을 추정했는데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대강 일정을 준수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분명 밤 늦게 회사에 남아 일한 기억은 옅어지고 그 결과로 인해 개발이 진행된 업무의 결과에 대한 기억은 더 강하게 남았을 겁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정확한 일정 추정을 계속해서 방해하고 스스로가, 또 프로젝트 단위의 일정 추정을 개선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또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비자발적 초과근무를 반복하는 개개인의 몸과 마음이 망가집니다.
종종 의욕에 불타는 주니어님들이 이런 행동을 더 많이 보이곤 하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지금은 젋으니까, 또 열정이 있으니까, 또 배움을 갈망하니까 등등의 여러 이유로 회사에 남아 잘못 추정된 일정을 준수하느라 노력하고 있지만 이건 개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잘못 추정된 일정을 미리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는 중간관리자들과 이 상황을 의도적으로 방치하는 상위관리자들, 그리고 프로젝트 관리자들의 잘못입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면 프로젝트 전체의 관점에서도 댓가를 치르게 되지만 구성원 개개인의 입장에서도 복구하기 어려운 댓가를 치르게 됩니다. 개인의 마음은 서서히 망가져 스스로의 의도와 관계 없이 동료, 가족, 친구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커리어패스의 지금 시점에 굳이 필요하지 않은, 긴 호흡으로 볼 때 잘못된 방향의 이직을 시도해 오랫동안 어두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이 너무 많아 어느 정도 통제된 초과근무시간 안에 일을 마무리할 수 없다면 스스로를 의심하기 전에 과연 이 업무의 일정추정은 올바른 것인지 의심해봐야 합니다. 이런 의심을 계속해서 품는 쉬운 방법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을 기약한 다음 집에 가는 겁니다. 그러니 그만 마무리하고 집에 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