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월드 게임과 주의력
이전 생각의 멱살에서 제가 다른 분들에 비해 주의력 혹은 집중력을 원활하게 원하는 것에 사용하기 어려워 생기는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소개한 적 있습니다. 머릿속 만으로는 한 가지 생각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쉽지 않고 또 눈 앞에 있는 집중해야 할 대상에 집중한 상태를 유지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생각을 계속하거나 집중을 유지하기 위해 필기나 타이핑의 도움을 받고 이런 습관을 지탱하기 위해 디지털 노트에 글씨 쓰기, 아주 많은 텍스트를 저장하고 검색하고 또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도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오픈월드 게임을 좋아하는데 실제 세계에 없는 독특한 가상 세계가 있고 그 안에서 그 세계의 규칙을 따르는 범위 안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길거리에 세워진 차를 훔쳐 몰고 다니거나 한국의 수도권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광을 감상하거나 탱크를 몰고 다니는 것 같은 특이하고 실제로는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한 경험을 할 수 있어 매력적입니다. 또 이런 게임에는 메인 스토리 뿐 아니라 자잘한 할 거리가 엄청나게 많은데 우선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자잘한 이야기를 따라가며 세계에 몰입을 도와주는 서브 퀘스트, 자동차 경주 같은 가상 세계의 레벨디자인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임디자인 요소들은 메인 스토리를 잠시 미뤄두고 서브 퀘스트에만 집중해도 여전히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오픈월드 게임을 플레이 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늦은 시점에 스토리 엔딩을 보곤 하는데 가령 데스스트랜딩은 대략 20시간 정도 플레이 하면 엔딩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50시간 넘게 플레이한 시점에도 여전히 스토리는 한 절반 밖에 진행하지 않은 상태인 적도 있고 어쎄신크리드 오리진, 오딧세이는 각각 100시간 이상 플레이했으며 가장 최근에 플레이 하다가 디아블로 4 때문에 잠깐 쉬고 있는 파크라이 6 역시 수 십 시간을 플레이 했지만 여전히 스토리는 중후반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느 날 의학의 역사 ADHD 편을 보다가 문득 오픈월드 게임을 좋아하고 또 오픈월드 게임만 잡으면 메인 스토리를 플레이 하기 보다 가까이에 있는 여러 서브 퀘스트에 집중하고 또 가상 세계 곳곳에 널려 있는 온갖 놀 거리에 집중하느라 수 십 시간을 플레이 하면서도 그래서 이 섬에서 가장 나쁜 그 놈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관심이 별로 없고 주민들의 일상에 일어나는 온갖 잡다한 일을 수행하느라 운전을 하고 총을 쏘고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탱크를 모는 등 온갖 활동을 하며 신나는 시간을 보내지만 게임의 핵심 스토리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플레이 스타일이 혹시 이런 특성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지금까지 오픈월드 플레이를 하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 거의 항상 그랬습니다. 심지어 월드맵에는 어떤 퀘스트를 플레이 하면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는지, 다른 퀘스트는 그렇지 않은지를 표시하고 있었고 이는 가장 최근에 플레이 하던 디아블로 4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스토리를 클리어 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디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상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내가 지금 당장 그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을 할 기회가 사라져버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런 특징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례에는 사이버펑크 2077의 마지막 미션이 있는데 스토리 상 이 미션을 시작하면 한동안 메인 스토리가 길게 이어지며 이야기의 결말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도자기와 약속을 잡은 레스토랑에 올라가려고 하면 갑자기 익숙하지 않은 팝업이 나타나 이 미션을 시작하면 한동안 다른 플레이를 못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볼 정도입니다.
게임 속 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이벤트가 도시 한가운데 눈에 잘 보이는 자리에 떡하니 저를 기다리고 있지만 이를 애써 모른 척 한 체로 그 주변의 나머지 온갖 잡다한 서브 퀘스트를 플레이 하며 제 미래가 결정되는 순간을 최대한 뒤로 미루며 계속해서 나이트 씨티 전체에 걸쳐 펼쳐진 온갖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해도 제 미래를 결정할 그 중요한 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도자기는 몇날 며칠이 흘러도 그 자리에서 영원히 저를 기다릴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잠깐 미루고 다른 온갖 주의를 끄는 일에 정신을 파는 행동이 일상 생활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이번에 디아블로 4를 플레이 하면서도 거의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디아블로 4의 스토리라인은 크게 릴리트가 성역에 내려와 돌아다니며 벌이는 행동, 이 행동과 시차를 두고 이를 추적하는 세 인물의 여정을 플레이어가 따라가며 진행됩니다. 마치 디아블로 2에서 먼저 같은 길을 지나간 여행자의 행적을 따라 가며 여러 가지 일을 겪는 경험과도 비슷한데 이를 여러 인물로 나눠 서로 다른 도시에서 다른 흔적을 따라 모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진행해 가기도 해서 이전보다 아주 조금은 더 입체적인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이 모든 핵심 사건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시작하기 이전 시간대에 이미 일어났고 이 사건을 따르는 게임 속 시간 상 현실에서 이야기 진행은 게임 속 다른 캐릭터들이 담당하며 플레이어는 오직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악마를 처치하고 또 이들의 조금은 모난 행동을 성역 바깥의 사람 시선으로 바라보는 역할에 그칩니다. 영화 시카리오에서 FBI 요원인 케이트는 영화 전체의 주인공이지만 영화 속 사건은 주인공과는 아무 상관 없이 진행되는데 주인공은 오직 이 영화 속 세계가 얼마나 이상한지 시청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그에 맞춰 행동하는 역할을 하는데 디아블로 4의 주인공인 나 자신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사이버펑크의 도자기 사례처럼 제가 저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의 온갖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어도 세계의 시간은 오직 제게 맞춰 움직이며 이 과정에서 저 자신이 핵심 스토리라인으로부터 좀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핵심 스토리라인 그 자체는 제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서만 진행되니 실제 세계에서 다른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에 정신이 팔려 일을 그르치더라도 오픈월드 가상 세계에서만은 그렇지 않아 더 집중하고 또 더 즐겁게 플레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에 디아블로 4를 엔딩 까지 플레이 하며 일어난 일을 표현하면 도난이 아주 중요한 일로 급히 저를 불렀지만 거기까지 걸어가던 저는 문득 “아니 여기 소름돋는 지하실이 있잖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라며 지하실에 들어가 악마를 잔뜩 썰고 나서 전리품을 잔뜩 챙겨서는 도난이 저를 기다리고 있음을 잠시 잊고 포탈을 열어 마을에 돌아가 전리품을 정리하고 장비를 바꾸고 보석을 만들어 끼우다가 그 옆에서 울고 있는 마을 주민의 잃어버린 짐을 찾아다 주고 지도를 열어보니 “아 맞다! 도난!” 이러며 다시 도난에게 걸어가다가 또 다른 던전을 만나기롤 반복하며 도난이 몇 날 며칠 동안 저를 기다리는 사이에 저는 성역의 거의 모든 주민들의 의뢰를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오픈월드 게임을 좋아하면서도 또 메인 스토리라인을 클리어 하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며 게임 자체를 오랜 시간에 걸쳐 플레이 하는 이유는 게임의 특성과 개인적으로 주의력을 사용하는 방식의 특징이 잘 맞물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 세계에서는 이런 행동은 문제가 되며 이런 문제를 최소화 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가상 세계에서는 세계 전체가 저 자신의 이런 행동을 용인하고 저를 기다려주므로 편안하게 등을 의자에 기댄 다음 느긋하게 제 주변을 둘러싼 온갖 할일에 편안하게 마음을 맡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