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전설적 프리젠테이션
개인적으로 애플 비전 프로에 꽤 설득됐습니다. 본격적인 소비자용 VR 장치는 엔터테인먼트 용도로 팔리기 시작한 것 같지만 초기 제품의 어처구니 없는 완성도에 한번 호되게 데인 다음에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제는 어지간히 저렴한 제품도 그럭저럭 참아줄 만한 완성도인 것 같도 이미 엔터테인먼트 외에 생산성 용도로 사용하는 분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특히 VR 관련 개발 하시는 분들이 고글을 벗지 않은 상태에서 개발을 이어나가기 위해 VR 환경 안에서 콘솔을 열어 작업을 계속하는 환경을 구축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산성 용도로 VR을 사용할 수 있으면 일상적인 컴퓨터 사용에 완전히 새로운 장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2023년 초여름 현재 아직 제품이 나오려면 반 년도 넘게 남았고 또 한국에 출시 될지 말 지도 확실하지 않은 마당이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정보를 바탕으로 꽤 의미 있는 제품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입니다.
제품을 소개하는 영상 상당 부분을 생산성 환경에 대한 이야기로 채우고 있습니다. 특히 AR 환경 안에서 가상의 모니터를 사용할 수 있는데 그런 기계가 다른 기계에 독립적으로 부드럽게 동작한다면 이 VR 기계는 사실상 모니터와 컴퓨터를 함께 구입하는 아이맥을 대체하는 포지션을 차지할 수도 있을 겁니다. 게다가 주변의 시선을 감수할 수 있다면 어디든 꽤 괜찮은 컴퓨터와 프라이버시를 유지할 수 있는 커다란 모니터 여러 대를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어 보여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처럼 애플의 1세대 제품은 넉넉하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 기준에서 거르는 편이 좋음을 알고 있고 당장 필요한 제품이 아니니 조금 거리를 두고 지켜 볼 작정이지만 때가 되면 크게 관심을 가지고 사용을 검토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제품을 발표하는 키노트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발표하는 자리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도록 아무런 재미도 없고 또 아무런 감동도 없었습니다. 마치 첫 번째 애플워치를 발표하던 그 키노트 만큼이나 아무런 재미가 없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 발표한 제품이 나쁘지 않아 보이고 나름 제품 설명에 설득 되었다는 점입니다. 만약 제품에 설득 되지 조차 않았다면 정말 많이 실망스러웠을 것 같고 또 당장의 주가 하락에 ‘내 그럴 줄 알았지’라며 빈정거리는 반응을 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나먼 옛날 애플은 회사의 상황, 자신들이 생각하는 시장, 고객의 요구, 그에 따른 제품을 발표로 이어지는 과정을 놀라울 정도로 잘 발표해 온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모든 결과가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단 한 명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결정한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회사는 결코 그렇게 동작하지 않기에 비록 그 한 명이 아주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는 있었겠지만 그 발표는 한 사람만이 기여한 것이 아닐 겁니다. 다만 이전 시대의 발표는 확실한 맥락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몇몇 전설적인 사례를 돌아보면 인턴 CEO로 돌아와 회사의 온갖 제품군을 박살내고 컨슈머용 랩탑과 데스크탑, 그리고 프로용 랩탑과 데스크탑 제품군 딱 네 가지만 만들겠다고 발표하거나 주머니 안에 수천 곡의 노래를 담을 수 있는데 그럼 그 옆에 있는 동전 주머니는 무슨 용도인지 궁금했다며 그 안에서 아이팟 나노를 꺼내거나 세 가지 기계의 역할을 대신하는 한 가지 기계를 발표하거나 소파에 편안히 앉아 컨텐츠를 소비하는 기계를 발표해 왔습니다.
이런 제품 발표의 핵심은 맥락과 스토리텔링입니다. 이전 제품보다 몇 밀리미터 더 작아졌다든지 새로운 폰을 출시 하겠다든지 넷북과 랩탑 사이에 들어갈 만한 기계를 출시 하겠다든지 하는 발표는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무대에 올라와 아무 설명 없이 제품을 끄집어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지금부터 이 제품을 소개하고 제품의 역할과 기능과 미래의 가능성을 설명하기만 하면 됩니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맥락도 없고 스토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의 제품 두 가지를 발표하던 장면을 돌이켜 봅시다. 뭔가 중요한 말을 할 것처럼 사람들을 집중 시킨 다음 뭔가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는 아주 어렵지만 우리는 그걸 잘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다음 바로 광고 비디오를 틀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셔츠 자락을 걷어 지금까지 차고 있던 애플워치를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이 발표를 보고 좀 어이가 없었는데 제품을 소개하기 전에 이 제품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또 어떤 경험을 개선할 수 있는지 아무 설명도 없이 사람들 앞에 그냥 제품을 냅다 집어 던진 거나 다름 없습니다.
물론 이 시대 상황 상 이미 애플에서 시계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몇 년 전부터 나 있었고 그 전에 제품을 출시하려고 노력한 여러 플레이어 덕분에 이미 시장에는 꽤 괜찮은 시계 제품이 팔리고 있는 상황이었을 뿐 아니라 이미 이 날 발표에서 애플워치를 발표할 것임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과거에 애플이 했던 식으로 사용하는 순간에만 손에 집어 들었다가 사용이 끝나면 주머니에 넣거나 어딘가에 내려 놓는 식으로 밀접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밀착되지는 않는 제품으로부터 시작한 스토리텔링을 하기에는 청중들이 너무 안달 나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품에 대한 아무 기대도 없이 애플워치 소개 비디오가 시작됐을 때 ‘이게 뭐야’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이런 발표 방식은 애플스럽지도 않았고 또 제품을 소개 받는 고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2023년 키노트에서 소개한 애플 비전은 또 어떤가요. 황당할 정도로 9년 전 애플워치를 발표할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원 모어 띵’ 화면을 띄워 놓고 여러분이 기대했을, 또 이미 정보가 세어 나가 이미 뭘 발표할 지 이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애플이 새로운 제품을 발표한다는 것 이외에는 제품 비디오를 틀기 전에 제품에 대한 아무런 맥락도, 아무런 스토리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쯤 되면 비디오가 끝나고 팀쿡이 얼굴 가면을 벗자 그 안에 애플 비전을 장착하고 있었다든지 하는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
9년 전과 다른 점이라고는 그 사이에 코비드 국면을 거치며 발표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바뀌었다는 점 뿐인데 이번에는 사전에 정보가 세어 나간 나머지 안달 난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까지 제품을 소개하기 전에 제품에 대해 아무런 맥락도 스토리도 말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플은 현대에 탑 클래스 IT 기업들이 신제품을 소개하는 방식의 표준을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회사의 최고 책임자가 직접 제품을 소개하고 직접 제품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은 이전에는 대중이 접하기 쉽지 않은 장면이었고 그런 소개는 잘 와 닿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최고 책임자 뿐 아니라 회사의 각 분야를 담당한 여러 책임자들이 무대에 올라 자신이 담당한 제품을 소개하고 또 제품을 직접 사용하며 애플이라는 회사가 사실은 전설적인 단 한 명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회사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협력해 대단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회사임을 성공적으로 인식 시켰습니다.
또한 코비드 국면을 거치며 기존 오프라인으로 하던 이벤트를 온라인으로 전환해 퍼블릭 스피치에 아주 익숙하지 않더라도 미리 준비한 다음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제품 관련 책임자 누구라도 발표할 수 있었고 오프라인에 비해 다양한 방법으로 제품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발표 스타일은 심지어 코비드 국면의 온라인 발표를 포함해서 여러 회사들이 복제했고 이런 스타일은 탑 클래스 회사들이 제품을 발표하는 일종의 표준에 가까워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표준을 만들어낸 애플 스스로는 책임자들이 직접 제품을 사용하며 설명하는 스타일의 발표 스타일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런 표준이 만들어지게 된 맥락을 스스로 잊지 않았나 싶습니다. 애플의 제품 발표는 고객들에게 제품이 필요한 맥락과 어떤 제품이 존재했다면 우리들의 삶이, 일상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미리 궁금하게 만든 다음 거기에 딱 맞는 제품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실망스럽게도 제품 발표 자체가 이미 고객들의 궁금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더이상 제품이 필요한 맥락을 전혀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제품 비디오를 냅다 고객들 면전에 던져 놓고 알아서 보라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인물이 영원할 수 없고 그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애플은 이전에 단 한 사람이 모든 책임과 통제를 짊어진 회사라는 이미지에서 회사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의 기여에 의해 제품을 만들어내는 이미지로 잘 변해 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인물들이 제품을 소개하고 그들이 온라인 상의 다양한 미리 준비된 환경에서 발표를 수행하는 모습은 지난 세월에 걸쳐 회사의 이미지가 성공적으로 변해 온 결과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10년에 걸친 두 제품의 발표를 보며 아무리 그래도 고객에게 제품을 소개할 때 갖춰야 할 어떤 예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한편 개인적으로 요즘 세상에 고객에게 제품을 소개할 때 제품의 맥락을 소개하고 제품에 대한 스토리를 들려준 다음 제품을 소개하고 또 그 제품의 장점에 스스로 빠져들어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사용하는 사람은 오히려 마이크로소프트의 파노스 파네이라고 생각합니다. 널리 알려진 발표는 2021년 윈도우 11 런칭 이벤트가 있는데 컴퓨터를 사용해 일하고 생활하고 또 사람들과 연결되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 관점에서 윈도우라는 소프트웨어가 차지하는 위상은 무엇이고 또 윈도우는 어때야 하는지를 인구밀도가 높은 동아시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 입장에서는 잘 공감 되지는 않는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진에 나타난 환경에 공감하지 않았을 뿐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느낌을 주면서도 생산적이고 내가 원하는 작업이라면 뭐든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제품의 맥락을 잘 표현했습니다.
먼 과거의 애플이 단 한 사람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제품을 발표한 적이 있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좀 더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방식으로 제품을 소개하는 느낌인데 유튜브 영상 답글 중 누군가가 ‘이 사람 좀만 더 하면 눈물을 흘릴 것 같다’는 글이 기억에 남습니다. 답글을 읽고 피식 웃었지만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설적인 프리젠테이션으로 2007년 아이폰 발표를 꼽고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2015년 서피스북 프리젠테이션 역시 전설에 등극할 만 합니다. ‘디 얼티밋 랩탑’은 너무 뻔한 표어인데 이 표어에 기반해 대대로 하드웨어 평판이 좋았던 마이크로소프트가 리퍼런스로 삼을 만한 랩탑 제품을 발표하는 그냥 뻔한 자리였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파노스 파네이는 서피스를 소개하며 맥북 에어와 무심하게 서피스를 비교하며 굳이 설명하지 않고도 강점을 보여주거나 전면 카메라 성능을 보여주기 위해 무대에 불을 꺼 보라고 한다든지 갑자기 테이블 아래에서 기계 몇 대를 끄집어내 청중에게 나눠 주고 직접 보라고 하는 식의 독특한 발표를 해 왔습니다.
파노스 파네이는 뻔한 랩탑 신제품을 소개한 다음 제품 소개 비디오를 한번 더 보라며 이번에는 조금 더 자세히 보라고 말하며 비디오를 재생하는데 이번에는 앞에서 전혀 소개하지 않은 베이스와 분리되는 모니터, 모니터만으로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동작하는 세상에서 가장 얇은 i7 컴퓨터를 보여줍니다. 먼 옛날 애플 스타일이 청중에게 제품의 필요를 미리 느끼게 만든 다음 그 필요에 딱 맞는 제품을 발표하는 식이었다면 현대 마이크로소프트 스타일은 서피스북 처럼 청중을 놀라게 만들거나 새 윈도우처럼 공감을 불러일으킨 다음 제품을 소개하는 방식을 정립했습니다.
결론. 애플은 그 스스로 현대 탑 클래스 IT 기업들이 제품을 발표하는 방식의 표준을 만들었고 심지어 코비드 국면을 거치면서도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냈지만 먼 옛날 청중들에게 제품의 맥락과 스토리를 먼저 들려준 다음 제품을 소개하는 일종의 고객에 대한 예의를 지킬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 실망스러운 발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 발표는 애플이 정립한 표준을 따르지만 청중을 놀라게 만들거나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스토리텔링으로 고객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방식으로 발표를 하고 있고 이 발표 중 몇몇은 오래된 전설을 대체할 살아있는 전설에 등극할 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