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 모라
문득 2022년에 읽은 책을 정리해 놓고 보니 2023년은 벌써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뭘 별로 읽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작년에 읽은 ‘내가 행복한 이유’ 이후 같은 작가의 ‘쿼런틴'을 읽긴 했는데 나쁘지 않은 인상과 달리 '내가 행복한 이유’에 수록된 단편 중 한 가지 이야기로 이 정도 장편을 만들기에 적당한가 싶은 의문에 빠져 며칠 생각하다가 그만 아무 글도 남기지 못한 채 지나갔습니다.
‘카리 모라’는 궁금하긴 했지만 읽을지 말 지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블랙 선데이’부터 시작해 토머스 해리스의 이야기들을 무척 좋아하고 그 중 한니발을 가장 좋아한 나머지 피렌체에 가기도 했지만 ‘한니발 라이징’은 꽤 실망스러웠고 그 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과연 이 분의 새 이야기가 오랜 세월에 걸쳐 오른 기대를 만족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또한 먼저 책을 읽은 분들이 남긴 나쁜 평가 역시 괜히 돈 내고 시간 내고 실망스럽기만 한 경험을 하게 되지 않을지 걱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한니발 라이징’만큼 나쁠까 싶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이 소설을 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편 딱히 스포일링을 할 생각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스포일링 할 가능성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할 작정입니다. 만약 스포일링이 걱정된다면 이어서 읽지 않는 쪽을 추천합니다.
‘카리 모라’는 등장인물 이름입니다. 작가의 이야기들이 주로 1990년대 전후를 배경으로 했던 것에 비해 이 이야기는 2020년대의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2022년 겨울에 이 해의 마지막 책으로 한니발을 다시 읽으며 신문 기사로부터 소식을 얻고 텔레비전을 통해 사건이 중계 되며 집에 있는 커다란 폰 배터리를 교체한다든지 위조한 신분증으로 쉽게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설정에 익숙해져 있다가 같은 작가의 소설에서 갑작스레 장을 본 다음 우버를 타고 집에 돌아오고 또 사진을 아이패드로 전송해 확대해 보는 장면을 보며 아주 잠깐 동안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이야기는 마이애미 해안에 있는 어느 집에서 살고 있는 주인공 카리 모라와 이 사람을 둘러싼 대단히 위험해 보이는 등장인물들, 그리고 이들이 카리의 집에 가진 관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위험한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주인공을 성적 대상화하는 장면들은 불편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성격이나 목표,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미리부터 상상하고 걱정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장치입니다. 이야기는 금새 여러 사람들이 나오는 여러 그룹이 같은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기 할 일을 하는 방식으로 넓어져 고조되는 어떻게 보면 시각적으로 풀어내기에 적당한 전형적인 방법으로 전개됩니다.
1990년대 관점에서 이런 전개 방식이 낯설지는 않지만 서기 2020년대를 살아가는 미래 사람의 낮은 집중력과 기억력으로는 잠시 동안 당혹스러웠습니다. 최근에 읽은 이야기들은 더 적은 등장인물이 등장하며 핵심적인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을 확실히 구분해 진행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강하게 집중하지 않고서도 이야기를 쉽게 따라갈 수 있었는데 이는 마치 머릿속을 비우고 화면에 눈을 맡긴 채 영화를 따라가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오래 전 방식 그대로 서로 다른 그룹 각각에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며 이들은 각자의 배경과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사건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충분히 집중하지 않은 채 사건을 보면 이 사건이 어느 그룹에 속한 어느 인물에 의해 일어나고 진행되고 있는지 쉽게 놓칠 수 있습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책을 읽은 분들이 낮은 평가를 하며 전개가 어수선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카리 모라와 마이애미 해변의 집, 집을 둘러싼 여러 그룹의 관심, 이 그룹들 간의 충돌, 집에 관련된 사건 하나, 그리고 카리 모라를 향한 사건 하나로 구성됩니다. 사실 카리 모아와 해변의 집을 둘러싼 이야기와 카리 모라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는 위에서 소개한 대단히 위험해 보이는 인물 관점에서는 서로 연결 되어 있지만 이 인물을 제외하면 서로 잘 연결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두 가지 큰 사건 중 집을 둘러싼 사건 하나만 있었어도 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굳이 카리 모라를 둘러싼 두 번째 사건을 포함함으로써 현대에 잘 어울리지 않는 성역할 묘사나 범죄 묘사가 썩 유쾌하지 않습니다.
한편 소설이라 할지라도 명백한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행동이 올바른지 잠깐 생각해봤습니다. 사실 이 위험한 인물의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행동에 그나마 동의하기 위해서는 이 인물의 과거를 알 필요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마치 한니발 렉터가 아무리 매력적인 캐릭터이더라도 이 인물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한니발 라이징’으로부터 받은 불편한 느낌을 이 소설에 등장하는 한 악인의 묘사로부터 비슷하게 느꼈습니다. 필요함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한편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 자체는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여러 등장인물과 여러 시점이 한번에 튀어나와 당황할 수 있지만 크게 집을 둘러싼 세 그룹, 카리 모라의 과거와 현재에 기반한 두 가지 시간대로 정리하면 이야기는 그리 복잡하거나 어수선하지 않습니다. 또 영상화를 염두한 설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치 덴 브라운 소설처럼 시각적인 묘사는 때때로 으스스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시각적인 묘사 덕분에 한동안 머릿속 마이애미 해변의 이미지가 드라마 덱스터에 기반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카리 모라에 기반한 이미지가 더 강해졌습니다.
1990년대 스타일로 2020년대에 일어날 법 한 범죄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나쁘지 않습니다. 조금 불편한 지점들을 적당히 넘어갈 수 있고 또 여러 등장 인물이 서로 다른 곳에서 등장해 이야기를 끌어 가는 방식을 ‘어수선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