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안 비상통화장치 사용 경험
지나친 인력 감축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큰 사고의 예고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회사에서 조금 일찍 퇴근했는데 퇴근할 때 타고 지나간 지하철 노선이 몇 시간 후 문제를 일으켜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는 열차 안에서 대기해야 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런 일이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다시 한 번 인식했습니다. 종종 만약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사고가 아니더라도 문제 상황이 생겼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상상해 보곤 합니다. 그런 상황을 마주할 때 결코 침착하게 행동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합니다. 아마도 명백히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아무 것도 안 한 채 시간을 끌다가 중요한 순간을 놓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좀 늦게 퇴근하던 어느 날 열차가 역과 역 사이가 많이 긴 구간에 진입해서 몇 분이 흘렀을 무렵이었습니다. 늦은 시각 열차 안에는 여전히 사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출퇴근 시간만큼 옆사람들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느끼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 사이를 쉽게 이동할 수 있는 만큼 공간이 넉넉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열차에 타자 마자 전속력으로 반대쪽 문 구석에 자리를 잡고 문을 등지도 헤드폰을 낀 채 폰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문득 옆에 기둥을 잡고 서 있던 사람이 제 앞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분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어어어’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저 역시 그 분이 바닥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며 헤드폰을 내리고 허리를 숙였습니다.
약 1초 사이에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떠올려 봤습니다. 설마 이전에 교육 받은 그걸 해야 하는 상황일까? 그때는 주변이 비교적 조용하고 공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 안인 데다가 열차 소리와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어 시끄러운데?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내가 배운 대로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을까? 이런 온갖 생각을 하며 일단 그 분 옆에 쭈그리고 앉아 교육 때 배운 대로 양 손으로 어깨뼈를 두드리며 괜찮으시냐고 물었습니다. 배운 대로라면 여기서 의식이 있거나 없거나, 또 호흡이 있거나 없거나를 확인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깨뼈를 두드리며 확인해 보니 다행히 그 분은 몸이 축 늘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세 번째 확인할 때 그 분은 눈을 뜨고 당황한 듯 몸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듯 휘청거렸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분이 일어나며 일단 여기 앉으시라고 권했지만 그 분은 휘청거리는 몸으로 기둥을 붙잡고 괜찮다며 서 계셨지만 이내 다시 쓰러지려는 걸 끌어 안다시피 하며 부축합니다.
이제 뭔가 행동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차내 비상통화장치를 사용해 관리자에게 알리거나 전화로 구급차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을 합니다. 저 자신도 굉장히 힘든 날 지하철에 서 있다가 휘청거린 적이 있습니다. 쪽팔림을 참고 원래 내릴 곳에서 내린 다음 잠깐 앉아 쉬면 해결되곤 했습니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구급차를 부르는 것이 올바른 행동일까요?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비상통화장치를 통해 다음 역에서 역무원들을 대기시키는 것이 올바른 행동일까요? 역무원들을 대기시켰는데 더 심각한 상황이라면 처음부터 구급차를 불렀어야 하지 않을까요? 덜 심각한 상황인데 구급차를 불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니면 아무 상황도 아니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런 온갖 생각을 하며 아무것도 안 하는 사이에 옆에 있던 다른 분이 비상통화장치를 가리켰습니다. 영상으로는 이 장치를 사용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동작하는지 모릅니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옆에 계시던 여자분이 통화장치를 꺼내 들었고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그냥 말하면 되는지 몰라 허둥대다가 일단 큰 소리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누군가가 ‘무슨일이세요?’ 하고 응답했는데 그 소리는 열차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고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소리는 비상통화장치를 꺼낸 상자 안에 달린 스피커에서 나고 있었고 저는 그 여자분께 상자를 가리키며 가까이 가서 이야기 하시라고 말합니다. 상황을 설명했고 관리자는 다음 역에 역무원을 대기시키겠다고 했는데 옆에서 열차 번호를 불렀지만 비상통화장치를 통하면 열차 번호를 알려주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고 그 상태로 환자가 발생해 정차 후 대기한다는 안내가 나왔습니다. 비상통화장치를 통해 상황을 말하고 나서 2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역무원들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제가 내릴 역은 아니었지만 내려서 상황을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내리려고 하자 상황을 보고 있던 다른 분이 제게 자신은 원래 여기서 내리니 상황을 확인할 테니 내리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고 굳이 옆에 서 있어 봐야 도움이 안 될 것이 확실해 감사하다고 고개를 까딱 한 다음 열차 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분은 역무원의 부축을 마다하며 환승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몇 분에 걸친 정차가 끝나고 다시 출발했습니다.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비상통화장치 선을 정리해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고는 멋쩍게 뚜껑을 닫았습니다.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릅니다. 혹시나 해서 나중에 기사를 찾아봤지만 아무 말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배운 대로 의식을 확인하는데까지는 했지만 그 다음에 우물쭈물하며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한 자신이 과연 앞으로 다른 일을 겪게 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유효한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습니다. 또 그 상황에 모두가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비상통화장치를 집어 들고 상황을 설명했던 여자분을 생각하며 그게 유효할지 그렇지 않을지 판단하기 이전에 일단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그 분처럼 일단 행동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처음으로 열차 내 비상통화장치를 만져보고 또 이 장치를 통해 이야기를 해 봤습니다. 이전 보다는 비슷한 상황이 생길 때 덜 고민하고 일단 집어 들어 다짜고짜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큰 일이 아닌 일을 통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