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오래 전에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이 책을 선택할 때는 책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습니다. 제목을 보고 앞 부분을 읽어봤는데 맨 처음 소개한 에피소드가 당시 저에게는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당시에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보니 뒷맛이 썩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몇몇 협상 요령은 흔히 알려진 동북아시아 지역의 문화 기반에서 성장한 저에게는 당연하고 한편으로는 낮은 계급 가정에서 성장해 온 입장에서는 지나친 요구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다시 꺼냈습니다.
지방에서 살다가 맨 처음 서울에 올라와 웹 서버 프로그래머로 일했습니다. 어느 날 회식이 끝나고 만취 상태로 다 같이 역까지 걸어가는 길에 대표가 노점에서 잘 기억나지 않는 먹을 것을 구입하며 당시 저에게는 상당히 무리하게 느껴지는 어떤 요구를 했습니다. 우리는 대표가 하는 행동을 보고만 있었는데 나중에는 서로의 언성이 올라갔습니다. 결국 대표는 원하는 것을 얻었고 그걸 나눠 먹으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쪽팔림은 잠깐이고 행복은 길다고요. 이 회사와 인연은 임금이 체불 되기 시작해 첫 게임 회사로 옮기면서 끝났지만 이 에피소드는 마음에 남았습니다. 점포가 정해 놓은 규칙을 어기며 무리하게 무엇인가를 얻어 내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생각과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것 역시 의미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의문을 가지고 살아가며 고민하다가 처음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첫 에피소드는 이미 문이 닫힌 연결편 비행기에 탑승하는 내용입니다. 이전 비행기가 연착 되어 이번 비행기에 타지 못한 것은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비행기를 타지 못할 상황이었고 휴가 일정이 망가지기 시작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그 순간 요행과 이 요행을 불러일으키는데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적당한 행동을 통해 항공사 직원을 직접 설득해서는 탈 수 없었던 비행기에 타게 됐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비행기에 이미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몇 분 정도 지연을 겪게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비행기에 타게 됐고 휴가 계획이 망가지지 않게 됐습니다. 문득 과거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쪽팔림은 잠깐이고 행복은 길다.
이 책은 이런 시작과는 달리 일상 생활에서 염두해 둘 협상론의 여러 사례와 각 사례의 간단한 이론적 배경, 실행 요령을 설명합니다. 협상이라고 써 놓고 보면 내가 협상을 할 일이 별로 많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을 설득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모든 상황을 협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제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제가 협상이라고 인지하는 사건의 범위를 넓히게 된 것입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첫 장면 같은 상황만 협상으로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다못해 지하철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야 하는 나를 가로막고 선 사람에게 지나가겠다고 말하며 길을 열어 달라고 하는 행동도 협상의 범주에 넣을 수 있습니다.
협상의 목표를 명확히 할 수 있었습니다. 협상은 근본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설득해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이를 위해 내가 원하는 바를 명확히 정의해야 하고 또 이를 위해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또 할 수 있는지를 예상해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합니다. 가령 협업 부서에서 오늘 오후까지 내게 작업 결과를 넘겨 줘야 오늘 안에 내 일을 끝마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상대는 아직 작업을 시작하지조차 않았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오늘 안에 내 일을 끝마치는 것, 상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장 집중해서 내가 필요한 작업을 완료하거나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대안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대안은 상대가 더 잘 생각해낼 수 있지만 대안을 만들어내는데 쓸 수 있는 힌트 정도는 제가 제시할 수 있어야 원하는 목표를 더 잘 달성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원하는 것이나 상대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을 미리 명확히 정의해 두지 않은 상태로 협상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상대의 입장을 더 많이 고려해야 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엉망진창으로 말해요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엉망으로 말할 뿐 아니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를 때도 있습니다. 협상 전에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두면 상대가 이상한 말을 할 때 그 말의 의도를 파악하거나 그가 처한 상황을 더 잘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그가 생각하지 못한 의도를 제가 대신 설명해 상황을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책에서는 이런 상황을 상대의 머리 속 그림을 그린다고 설명하는데 북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성장한 저는 글쓴이가 새롭게 강조하는 이런 요령들을 숨 쉬듯 사용하며 살아오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항상 고맥락 언어를 말하고 듣는데 익숙해진 입장에서 이런 요령이 별도 챕터로 설명할 만한 주제인가 싶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을 한번쯤 짚고 넘어가는데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말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거나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인데 이 상태로 제가 원하는 것을 주장해봐야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 상대가 원하는 것, 서로의 대안을 정리하면 어떤 방향으로든 이야기를 진전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협상 뿐 아니라 평소에 겪는 거의 모든 회의를 진행 시키며 배운 요령이기도 합니다.
다만 몇몇 주제는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제가 지불한 금액에 원래 약속된 서비스를 초과하는 뭔가를 얻기 위한 행동들이 그렇습니다. 이를 위해 상대의 심리적, 직업적 약점을 공략하거나 목적에 충실한 만들어진 인간적 유대를 형성하거나 이미 결정이 끝난 사안을 지속적으로 재협상하는행동들은 이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음에는 동의하지만 이런 행동이 쌓여 장기적으로 상대에게 올바른 결과를 가져올지 의심스러웠습니다. 또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는 뒤쪽 챕터는 이 교수님의 세계와 제가 살아온 세계가 서로 상당히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이쯤 되면 교수님의 세계는 꽃길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이상적인 협상 과정은 저와 상대 모두가 이성적인 상태임을 가정합니다. 실제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 뿐만 아니라 저 역시 제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비이상적 상태로 협상에 임하기 일쑤입니다. 때문에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협상 사례가 잘 적용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상대와 협상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상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의하는 상대와도 협상할 수 없습니다. 또 제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는, 또한 신뢰할 생각이 전혀 없는 상대와는 협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을 제 노력을 통해 협상 가능한 상태로 만들 수 있을까요?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가용한 시간 안에서는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간만에 책을 다시 읽으며 일상에서 경험하는 아주 많은 상황을 협상으로 정의하고 협상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다시 한 번 인식했습니다. 책을 처음 접하던 오래 전에 비해 상대의 입장을 파악하거나 상대의 생각을 바꾸는 행동들이 제가 하던 행동과 많이 다르지는 않음을 알게 되어 조금 안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약간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시도처럼 느껴지는 몇몇 부분은 여전히 불편했습니다. 미래에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또 달리 생각하게 될까요? 지금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한동안은 이 책을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뒷맛이 여전히 나쁩니다. 오래 전 만취 상태에서도 노점에서 대표에게 큰 소리로 억울함을 표현하던 그 분의 목소리를 떠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