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서비스 따위를 선택하는 단 한 가지 요령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 서비스를 사용해 보기 전에 그걸 사용해도 괜찮을지, 얼마나 편한지, 또 돈 값은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대체로 그런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합니다. 제가 질문을 주신 분들의 용도와 지불할 수 있는 금액, 그런 류의 서비스에 익숙한 정도를 미리 알기는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이런 선택을 할 때 고수하는 한 가지 원칙은 있습니다. 바로 사용하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내 눈앞에서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서비스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존재 자체가 내 의식 속에서 지워져버린다면 훌륭합니다.
가령 주머니에 들어있는 아이폰은 존재가 거의 지워져버린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냥 왼쪽 주머니에 들어 있고 끄집어낸 다음 눈앞으로 가져오기 전에 이미 손가락을 대서 잠금은 풀려 있습니다. 바로 이어 트잉하거나 할일을 보거나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이 기계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한 1년에 한 번 정도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그런 때가 되어서야 이게 실은 배터리도 달려 있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복잡하게 물려 돌아가는 기계라는 사실을 잠깐 깨닫습니다. 하지만 또 금새 기계의 존재는 사라지고 너무 자연스럽게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주고 받을 것입니다.
드랍박스를 몇 년째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서비스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드랍박스를 사용하기 전에는, 또 사용한 다음에도 한동안은 백업이라는 주제에 신경을 썼습니다. 내 파일은 일정 기간마다 안전한 장비로 복사되고 뭔가 사고가 일어나면 그 장비로부터 파일을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드랍박스를 사용하면서부터는 이런 비생산적인 일에 신경을 쓸 일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드랍박스는 그냥 내가 사용하는 모든 기계에서 그냥 돌고 있고 한 기계에서 파일을 올리면 다른 기계에 그 파일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너무 당연합니다. 심지어는 파일을 올린다는 개념 자체도 희박해졌습니다. 그냥 내 파일은 무슨 기계를 쓰든지간에 내가 예상하는 그 자리에 있고 단지 그 뿐입니다. 딱히 사고가 일어난 적도 없습니다. 새로운 기계를 사용하거나 사고가 일어나면 그냥 드랍박스를 설치하고 로그인한 다음 밤새 켜 두는 것이 다입니다. 복잡하게 백업 세트를 찾아 복잡한 복원 과정을 거치는 그런 일은 없어졌습니다. 백업, 동기화 뭐 이런 단어에 대해 생각할 일 없이 그냥 저장하고 그냥 불러다 쓸 겁니다.
크롬 브라우저 역시 존재가 거의 사라져버린 좋은 사례입니다. 이 웹브라우저는 설치한 다음 로그인하고 나면 그걸로 끝입니다. 이 브라우저는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고 나한테 뭘 선택하라고 하지도 않고 그냥 잠자코 돌아갑니다. 빨리 돌아가기 위해 내가 눈치채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기술이 동원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냥 충분히 빠르게, 예상한 대로 동작하면서도 나에게 존재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 잦은 업데이트조차도 그냥 내가 잘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한 기계에서 처음 가는 웹사이트 주소를 한 번 입력해 놓으면 아무 기계에서나 그 주소부터 자동완성되고 나중에는 내가 이 웹사이트를 어느 기계에서 처음 방문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을 끝없이 드러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맨 처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서비스를 추천하기는 어렵다고 이야기했습니다만, 추천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여기에도 원칙은 간단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뛰어난 역할을 할지라도 사라지지 않는 경우에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서비스는 아무리 오래 사용해도 익숙해지지 않은 채로 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고 때로는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소프트웨어 중에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원패스워드와 파일질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둘 다 업데이트 체크를 앱을 실행할 때 합니다. 나는 지금 당장 FTP 서버에 접속하고 싶고 지금 당장 패스워드를 끄집어내야 하지만 업데이트 체크가 앱을 실행할 때 먼저 나타나고 그 동안은 내가 하려던 작업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잠깐이나마 내 눈앞에서 사라졌던 이 소프트웨어는 다시금 의식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내 주의를 끌고 맙니다. 이어서 진행하려던 작업으로 가는 맥이 끊기고 그 맥을 다시 붙잡느라 한동안은 시간과 주의력을 날려야 합니다.
애플 소프트웨어 품질이 지난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나빠지고 있기 때문에 애플에서 만든 랩탑을 추천하기는 쉽지 않지만 대다수 제조사에서 만드는 윈도우 랩탑보다는 나은 점도 이런 부분입니다. 가령 델 랩탑을 처음 켜면 자랑스런 델 컨트롤 센터가 나타나는데 이것 역시 하드웨어를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게 만들고 사용자의 주의를 끌어 제대로 장비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윈도우 OS는 이제 어지간한 설정을 꽤 쉽게 설정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지만 이런 랩탑 제조사 탑제 앱은 한 15년 전에 윈도우가 지금보다는 좀 더 설정하기 어렵고 복잡했던 시대 이후에 별로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애플 소프트웨어를 추천하기 어려운 요즘도 애플 랩탑을 조금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졌는데,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서비스를 선택하는 단 한 가지 기준은 이들을 사용함에 따라 이들이 내 눈앞에서, 그리고 내 의식 속에서 사라져 자연스럽게 의식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들에 돈을 내는 것 조차 의식하지 않게 되겠지요. 하지만 반대로 자신을 드러낼수록 의식에서 뛰쳐나와 과금 기한이 될 때마다 이 서비스를 다음 기간에도 결제할지 말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