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노동의 동작원리

결론: 이 글을 통해 여러분들은 게임비즈니스에서 역사적으로 절대 실패한 적이 없는 프로젝트 관리기법을 적용해 팀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일하게 만드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드랍

드랍된 프로젝트를 상상해봅시다. 회사에서 드랍은 출시보다 훨씬 더 흔한 일이기 때문에 예상보다 훨씬 더 그 때 일어나는 일일 머릿속에 떠올리기 쉬울 겁니다. 사실은 얼마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리드그룹은 그동안 자신들이 어떻게든 감당하던 공포를 더이상 팀으로부터 격리하는데 실패합니다. 공포는 사무공간의 공기를 텁텁하게 짓누르고 이를 격리할 수 있었던 이전에 비해 더 위험한 목표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끈끈한 점액처럼 바닥에 흘러다닙니다. 위기를 느끼고 뭔가 해보려 노동시간을 늘리고 모든 것이 잠깐동안 완벽하게 동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찰나는 머지않아 수명을 다하고 한 점으로 모여들어 블랙홀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잔해는 슈바르트실트 반지름 근처에서 다시는 관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드랍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 거대한 바이너리 덩어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경영진의 승인을 받아 팀을 세팅하고 맨 처음으로 파일서버와 웹서버 하나를 만들어놓고 형상관리도구를 설치하고 계정을 만들고 팀원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빌드머신을 설정하고 또 분산빌드환경을 설치하고 위키에 첫번째 문서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적당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려 형식적인 면접을 거쳐 시작멤버를 모으고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회사를 설득해 티오를 받아내고 채용공고를 올리고 머리로는 양산형 게임을 개발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요즘 가장 잘 나가는 게임의 모든 것을 배껴댈 준비를 마쳤지만 결코 가슴으로는 이를 납득하지 못하며 괴로워하고 또 면접을 보고 새 계정을 만들고 매뉴얼을 업데이트하고 마일스톤 계획을 세우고 내일 출시할 것도 아니지만 오늘 갑자기 올라온 온갖 코드가 순조롭게 통합을 깨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초과근무를 일삼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동료들에게, 이 바이너리 덩어리에, 이걸 만들기 위한 모든 환경에, 심지어는 파티션에 설치된 이케아 케노피에마저 정이 들었습니다. 그런 프로젝트가 드랍된다는건 힘든 일입니다. 언제나 출시보다 드랍을 더 많이 겪지만 이 드랍은 정말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드랍은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럽지만 또 육체적으로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과거에도 똑같았지만 현대의 게임회사 직원의 신분은 서류상으로는 정규직입니다만 실제로는 프로젝트와 운명을 함께하는 비정규직입니다. 회사는 항상 형식적으로는 프로젝트의 드랍과 관계 없이 직원들의 고용을 보장하지만 실상은 꽤 많이 다릅니다. 운이 좋다면 대기 부서에서 정신을 서서히 파괴할 수도 있고 좀더 운이 나쁘고 또 좀더 흔하게는 업무를 중단하고 프로젝트 산출물에 접근권한을 잃어버린 다음 회사 안의 다른 프로젝트팀을 만나며 좀더 빨리 정신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드랍된 프로젝트의 구성원들은 항상 실패한 패배자들로 다뤄집니다. 느리든 빠르든 결국 정신이 파괴되고 이들은 더이상 파괴될 정신이 다 사라지기 전에 회사가 원하는 대로 회사를 떠납니다.

효율

이론적으로 팀이 최고 효율을 내도록 만드는 방법은 훨씬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일단 출근하면 회사 문을 걸어잠그고 계속해서 일을 시키는 겁니다. 하루에 8시간 일하는 상황을 기준으로 한다면 모든 사람을 집에 보내지 않고 24시간 일하게 만들면 대략 3배 빨리 일할 수 있습니다. 3년 걸릴 프로젝트라면 1년 안에 출시할 수 있고 1년쯤 걸릴 프로젝트라면 앞으로 4개월 안에 출시할 수 있겠네요.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몇몇 분들로부터 비슷한 시도가 일어나 왔고 결국 법률에 의해 노동시간 제한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 노동시간 제한 역시 여전히 이를 항상 실행할 때 개개인에게 강한 부하를 줍니다. 일생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일해야만 이 시간을 채울 수 있습니다. 게다가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이 앞뒤로 시간을 더해야만 하므로 실제로는 절반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을 준비하는데, 일하는데 사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팀이 최고 효율을 내도록 만드는 방법은 여전히 간단합니다. 사람들을 24시간 가둬놓고 일하게 만들 수 없다면 법률을 어기지 않으면서 하루에 약 11시간동안 일하게 하면 됩니다. 출퇴근시간을 제외하고서요.

반발

실은 이 극도로 효율적이며 대한민국 법률을 위반하지도 않는 방법은 실제로는 잘 동작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노동시간만 늘린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서 그 시간을 가득 채울만한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말에 전직원을 비싼 밥집에 모아놓고 언제나 절대영도에 가까운 시장상황과 오래 전부터 이미 현실이 된 반복적인 위기와 이를 모두가 함께 극복하기 위한 주인의식과 정신무장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경영진이 되지 못하고 그저 그런 게임 개발 스탭으로 남는 모양입니다.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지 않을 뿐더라 조금이라도 빈 틈이 생기면 노동시간에 어뷰징을 시도합니다. 흡연을 반복하며 긴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고 화장실에서 15분을 초과해서 앉아있기도 하며 사용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최소 수량만 갖다놓은 안마의자에 앉아 몇십분씩 시간을 날려버립니다. 이런 상황을 문제삼으면 반발이 일어납니다. 회사가 처한 위기를 극복해나갈 사람들이 이런 몸가짐으로 업무를 수행하는데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가짜 목표

오랜 전통에 빛나는 검증된 방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기만 하면 모든 스탭들이 굳이 문을 잠그지 않아도 알아서 집에 가지 않으며 알아서 초과근무를 하고 알아서 화장실 갈 시간을 절약하며 알아서 담배를 필터까지 씹어먹고 올 겁니다. 일단 현재 빌드 상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게임을 만들 것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단 이번달에는 실장님 보고 빌드를 개발할 겁니다. 실장님이 빌드 퀄리티에 만족하지 못하면 목표가 바뀔 수 있습니다. 목표가 바뀌면 그리 멀지 않은 달력에 설정된 공개일정은 그대로 둔 채 많은 사양이 변경될 위험이 있으므로 최대한 빌드를 갈고닦아 그럴듯한 모양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 과정에 기술부채가 조금 생기더라도 빌드에 드러나지 않을테니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트와 게임디자인에서 사용할 도구를 개발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 도구를 실장님께 시연할 것도 아니잖아요.

그 다음달에는 본부급 보고를 준비합니다. 이 보고에는 당연히 시연이 필요하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경영진을 가상의 고객으로 설정한 다음 이 가상의 고객이 제시할지도 모르는 가상의 요구사항에 대응합니다. 이 가상의 고객은 신규 클래스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고 또 화려한 전투진행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또 이 가상의 고객은 아이템 아이콘의 퀄리티와 가챠시스템의 효율과 매력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또 이 가상의 고객은 이른바 '콘솔게임같은' 멋진 언플레이어블 컷씬에 매력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또 이 가상의 고객은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절차생성된 서로 다른 애니메이션을 재생하며 지나가는 주인공을 칭송에마지않는 장면을 멋지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팀 전체가 가상의 고객을 상상하며 가상의 고객이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는 모든 부분에 집중해 완벽하게 돌아가는 빌드를 만들어냅니다. 이 가상의 고객은 우리들에게 급여를 지급합니다. 하지만 결코 우리가 출시한 제품을 구입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다음달에는 경영진급 보고를 준비합니다. 그 다음달에는 대표급 보고를 준비합니다. 그 다음달에는 다시 실장급 보고를 준비합니다. 이를 끝없이 반복하게 만들면 됩니다. 이제 사람들을 가둬놓지 않아도 사람들은 스스로 가상 고객의 롤을 플레이하며 가상 고객처럼 행동합니다. 단기적으로 완벽해보이는 빌드를 개발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기술부채가 조금 쌓이겠지만, 일상적인 플레이에 필요한 아트 에셋이 좀 부족하겠지만, 요구사항에 맞춰 고치지 못한 UI 위젯들은 아슬아슬하게 수정하고 빌드는 아슬아슬하게 움직이겠지만, 또 이미 큰 비용을 들여 제작해버린 멋진 컷씬은 게임에 들어맞지 않지만 버릴 수도 없으므로 게임을 여기 맞춰 바꿔야만 하지만, 모든 조직에서 사용할 툴이 미비한 나머지 기계가 1분이면 해결할 일을 인간 여러명이 밤을 세워 더 낮은 수준으로 해결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은 가상의 고객이 알 필요도 없고 가상의 고객이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으므로 이미 가상 고객의 롤을 플레이하는 스탭들의 관심사로부터 멀어집니다.

완성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탭들에게 이 기법 이름을 정확하게 알려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위협에 의한 자발적 강제노동기법'이라고 내 머릿속에는 기록해두겠지만 결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팀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이고 빌드는 언제 시연해도 아름다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것입니다. 이렇게 멋진 게임이 출시 후 실제 고객들로부터 굉장한 악평을 들으며 순식간에 가라앉는다면 이건 개발팀의 잘못이지 그 바깥에 있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이 실패자들은 가만 놔두면 알아서들 사라질테니 골치아플 일도 없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위협에 의한 자발적 강제노동기법을 습득하셨습니다. 이제 다음주부터 새로운 회사와 프로젝트를 시작하세요. 이제 게임 비즈니스에서 성공하실 수 있습니다. 진심을 담아 행운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