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성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포르자 호라이즌 4를 시작했습니다. 딱히 할인중이지도 않았고 또 할 게임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갑자기 이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몇 시간 플레이하지 않았지만 몇 가지 놀랐습니다. 일단 인터페이스와 로딩 처리가 너무 아름다운데 놀랐습니다. 특히 로딩은 레이싱을 시작할 때, 레이싱을 마친 다음 월드로 돌아올 때 로딩하는 동안 나는 로딩 공간에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로딩을 시작하기 전 내 자동차가 화면에 나타나던 상태 그대로 로딩 공간으로 이동하면 내 자동차 말고도 내 캐릭터와 배경에 인게임 디스플레이를 통해 주요 정보나 내 통계를 보고 또 내 차를 구경할 수 있고, 또 카메라가 이리 저리 이동하며 내 차의 여러 모습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차 안쪽을 포함해서요. 그러다가 로딩이 끝날 때 쯤 되면 자동차 앞면을 보여주는 카메라로 바뀐 다음 또다시 배경만 바뀌며 바로 레이싱 준비를 끝냅니다. 이 아름다운 로딩 처리에 놀랐습니다. 한동안 모바일에서 기기의 제약에 걸려 쓰레기같은 로딩만 만들다 보니 어느새 콘솔과 PC는 몇 년 전부터 이런게 당연한 시대가 됐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싶었습니다.

아. 지금 로딩이 문제가 아니라 게임을 시작해서 맨 처음으로 내가 메뉴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타난 메뉴는 ‘게임 시작’과 ‘접근성’이었습니다. 정말 굉장했습니다. 이 결과에 어떤 의사결정이 개입했을지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윈도우나 맥을 처음 설정할 때도 비슷합니다. 다른 작업을 하기에 앞서 내게 필요한 접근성 옵션을 미리 물어봅니다. 글자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 지, 자막의 배경을 얼마나 투명하게 할 지, 사운드를 모노로 바꾸거나 색맹 옵션을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화면 밝기나 음량을 설정한다면 이건 게임을 시작하고 나서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접근성 옵션은 게임을 시작해버린 다음에는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령 색약 옵션을 설정하지 못하거나 글자 크기를 키우지 못한 채로 게임이 시작되면 이미 초반 경험이 망가진 다음일 겁니다. 이 옵션을 바꾼 다음 게임을 다시 시작하고 싶을 겁니다. 캐릭터를 만들었다면 이걸 지우고 다시 시작해 아까 본 인트로를 다시 봐야만 했겠죠.

그런데.. 이들은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처음 나오는 화면에 접근성 메뉴가 붙어있었을 뿐 아니라 그 안으로 한번 더 들어간 메인메뉴에서도 옵션과 별도로 접근성 메뉴가 분리돼있었습니다. 방금 접근성 메뉴를 지나쳤더라도 한번 더 접근성 메뉴를 보여주고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게임 경험을 망칠만한 요소를 조금 더 줄일 수 있게 해줬습니다. 접근성 메뉴의 위치에 대해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우리들은 이런 고민은 고사하고 색약인 분들을 위한 메뉴나 텍스트 크기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게임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그런 상황은 세계에 존재조차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간신히 우리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아슬아슬하게 플레이할만한 결과물을 내놓고 그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람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만드는 UI 위젯은 텍스트 크기를 동적으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거기 손대는 순간 게임 전체의 인터페이스를 완전히 망가뜨리겠죠. 하지만 세계의 어느 한쪽에는 시작하자마자 접근성 메뉴를 보여줘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런 사람들과 우리들의 차이를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