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 협업 메타버스
요즘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메타버스 자체가 어그로를 끄는 단어이다 보니 ‘원격 협업 메타버스’라고 적어놓으면 분명 어그로를 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Virtual Cottage'라는 앱을 소개하는 트윗을 보고 실행하본 다음 이거야말로 메타버스의 한 가지 형태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현재의 메타버스가 어설프게 세계를 만들고 플레이어들의 일상생활을 모방하려는 삽질을 거듭해 스캠으로써 면모를 과시하는 가운데 메타버스에 일상과 게임이 혼재된 모양을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큰 문제에 도전하는 대신 좀 더 작은 일상을 메타버스에 구현하는 것은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어 만족스러운 모양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게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작은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이걸 확장해서 궁극적으로는 디센트럴랜드 같은 거대한 세계를 의미 있는 공간의 집합으로 완성해나가는데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앱은 아주 단순한 일일관리, 타이머 기능이 있고 음악과 효과음을 내 줍니다. 화면 한 가운데 있는 예쁜 그래픽은 사실 이 앱의 핵심 기능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밋밋한 타이머와 투두리스트에 비해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는 내가 마치 이런 아늑한 공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재미있었습니다. 실제 내 방에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예쁜 쉴 공간이나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를 내는 따뜻한 난로나 바닥에 러그 같은 건 없지만 빗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를 들으며 러그에 누워 자고 있는 고양이를 가끔 힐끗 거릴 때마다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갑작스런 전개에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지만 문득 이런 앱을 열 명 내외의 협업 앱으로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이 작고 아늑한 공간을 조금만 확장해서 서너명, 대여섯명, 열 명 정도까지 표현할 수 있는 약간 더 넓은 거실 같은 공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이 공간에 나타나 각자 저마다의 방법으로 일합니다. 누군가는 소파에 앉아 랩탑을 사용하고 누군가는 테이블에, 또 누군가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각자 일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키보드에서 손을 좀 떼고 있으면 캐릭터들이 기지개를 켜고 팔짱을 끼고 모니터를 노려보기도 합니다. 누군가 음악을 바꾸면 모두에게 음악이 공유되고 누군가 음악을 끄면 그 사람은 헤드폰을 쓴 모양으로 나타날 겁니다. 간단한 감정표현을 할 수 있어 각자 어떤 상태인지 나타내고 각자 상태를 변경하면 공간의 캐릭터들이 그 행동을 합니다. 자리를 비우면 거실에 달린 문을 열고 나가 공간에서 잠시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이 지금 온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아이를 라이딩하러 다녀오면 아이와 함께 공간에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공간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올 때 공간에 같이 있던 동물들이 반겨주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정말 반갑고 서로 떨어져 있어도 기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퇴근하기 시작하면 랩탑을 덮고 한 명씩 문 밖으로 걸어나가기도 하고 식사하러 자리를 비우면 일하던 자리에서 주방으로 걸어가 거기서 뭘 먹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 떨어져 일하지만 서로 가상 공간에 모여 자기 행동을 공간에 투영하고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꽤 따뜻하고 마음에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채팅도 음성도 안됩니다. 채팅은 이미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메신저가 있을 테니까. 채팅 수단을 늘리면 안됩니다. 음성도 안됩니다. 음성이 들어가는 순간 이 실제 세계를 모방한 가상 공간의 아늑함이 깨질테니까요. 각자 제한된 감정표현과 다양한 상태표현을 하고 그에 맞춰 공간과 캐릭터가 약간은 모호한 행동을 해 각자의 상태를 추측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무 때나 앱 상의 공간을 보면 어떤 사람들에게 지금 연락할 수 있고 누가 바쁜지, 누구에게 잡담을 걸어도 될지 짐작할 수 있도록 하는 수준이면 충분합니다.
이런 예쁜 분위기를 깨고 상업적인 측면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클래식하게 공간을 꾸밀 수 있는 요소를 직접 판매할 수도 있겠지만 메타버스와 함께 요즘 힙한 개념은 게임 상의 구성요소를 사고파는 메커닉을 게임 밖에 두고 구성요소 제작자와 판매자가 서로 직접 거래하는 것이니 이를 채용해와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령 나는 노랑둥이 고양이가 더 좋으니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가상 노랑둥이를 입양해 공간에 나타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바닥에 러그를 다른 걸로 바꾼다든지 소파를 다른 걸로 바꿀 수도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구입해 꾸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날 아침 이 공간을 보고 이야깃거리가 하나 생길 겁니다. 어 이 쿠션 귀엽네. 누가 사다 놓은거야? 같은. 다들 떨어져서 일하지만 그런 가상의 공통화제 하나쯤 생겨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다들 서로 떨어져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상의 일하는 공간이지만 메타버스에 현실을 가져온다면 이런 단순한 접근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