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코시와 알트 엔딩이 더 마음에 든다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면 사이버펑크 2077 이야기입니다. 사이버펑크 2077 플레이를 마무리한지는 한참 됐습니다. 하나코를 만나기 전에 머무르며 몇 가지 엔딩을 봤습니다. 아라사카타워 1층으로 떳떳하게 걸어들어가는 시크릿 엔딩은 조건을 달성하지 못해 볼 수 없었지만 더이상 궁금증을 가지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엔딩 설명 영상들을 보니 묘하게 V가 미코시를 선택하는 데빌 엔딩이나 조니 실버핸드에게 몸을 넘겨주고 다리를 건너 알트의 일부가 되는 엔딩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두 가지 엔딩이 나름 마음에 들어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이버펑크 2077 플레이를 마무리하고 나서 갑자기 차오른 공각기동대 뽕 덕분에 오래된 극장판 두 개를 다시 봤습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워낙 오래된 작품이어서 이 작품들을 볼 때 받았던 느낌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이제 이 작품들의 시점에서 미래의 인간인 제가 다시 본 공각기동대 극장판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친절했고 훨씬 절제된 구성이었습니다. 바로 알아들을 수 없던 이야기들도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극중에서 제기하는 의문들이 이미 사회에 스며든지 한참이 지난 세계에 사는 제게 공각기동대는 더이상 알 수 없는 선문답을 주고받는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또 방금 전까지 이 세계와 아주 비슷한 나이트씨티를 누비고 다닌 직후여서 더더욱 극중의 이야기가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제가 맨 처음 본 엔딩은 데빌 엔딩이었습니다. 타케무라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간 덕분에 V 입장에서 그리 기분 좋은 엔딩은 아니었습니다만 이 엔딩에서 V는 이제 조니와 비슷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이상 신체를 가지지도 않고 또 누군가의 정신에 기생하며 자아를 구동할 수도 없는 상태이지만 아라사카든 누구든 제대로 된 전신의체를 개발하고 또 티타늄 두개골과 의학용 뇌 디바이스로 가득찬 전뇌에 고스트를 깃들이는 마냥 새로운 육체를 얻어 이 세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게임 스토리에서 아라사카 사부로가 겪는 일종의 환생은 좀더 공각기동대스러운 결말을 기대하던 제게는 좀 식상했지만 미코시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엔딩은 V 입장에서 그리 나쁘지 않은 엔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코시는 마치 감옥 같은 이미지로 묘사되는데 전뇌기술이 좀 더 발전한 나이트씨티에서 미코시는 궤도를 돌며 지구상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타치코마같은 존재로 세계에 물리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음에 드는 두번째 엔딩은 절제. 우물에 들어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육체로 돌아가는 대신 다리를 건너 알트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사실 이 엔딩을 볼 의도가 없었는데 갑자기 마우스 휠이 안 굴러가서 다른 선택지를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선택지를 변경하지 않고서는 우물에 아무리 몸을 부벼도 우물에 들어갈 수 없었고 제게 남은 행동은 다리를 건너 알트에게 떨어져내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사실 이 엔딩은 V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니의 이야기로 끝나긴 합니다. 조니는 추모공권과 악기 매장을 들른 다음 버스에 올라 나이트씨티를 떠납니다. 이 세계에는 더이상 로그도 죽고 없는 마음 붙일 곳 없는 곳이지만 이제 조니는 V 대신 어디선가 남은 생을 살아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 엔딩은 조니 관점 대신 V의 관점을 보여줬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노센스에서 소령은 바토가 네트워크에 접속할 때 항상 함께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전뇌 용량이 작은 가이노이드에 음성과 전투제어시스템을 다운로드해 실제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기술적으로도 또한 영적으로도 설명하기 모호한 존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이버스페이스가 실제 세계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진 나이트씨티의 세계에서 장벽 너머 알트의 일부가 된 V는 자신의 육체로 돌아갈 때 얼마 남지 않았을 수명을 초월한 존재가 되었고 어쩌면 이제부터 V야말로 조니가 네트워크를 떠돌 때 항상 조니의 근처를 멤도는 존재가 될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엔딩은 좀더 V의 이야기로 마무리해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