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한동안 타임라인에 여러 가지 노트테이킹 방법을 설명하는 글이 지나간 덕분에 기존에 해 오던 노트 쓰는 방법을 돌아보고 고민할 계기가 됐습니다. 손으로 노트를 쓰고 있고 학교 다닐 때부터 이어진 습관은 2013년부터 같은 습관을 디지털로 옮겨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노트를 다 쓰면 새 노트를 사야 했지만 이제 노트를 새로 사는데 돈이 들지는 않습니다. 또 다 쓴 노트를 쌓아둘 필요도 없어졌고요. 하지만 이 습관을 디지털로 유지하는데는 상당한 댓가를 치러야 했고 또 치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제가 해오던 노트테이킹 방식을 설명해 두려고 합니다. 이유는 최근에 읽은 노트테이킹 방법 몇 가지를 생각해보면서 지금까지의 제 방식을 바꿔보자는 결론에 다다랐는데 그 결론을 이미 시도하고는 있지만 그 시도 전까지 어떤 식으로 노트를 작성했는지 적어두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계기

처음 손으로 작성한 노트에 강하게 의존하기 시작한 이유는 개방된 공간에서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훨씬 지난 다음에야 제가 다른 감각에 비해 청각 방해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사실을 검사를 통해 알게 됐지만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 공간에서 집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 각자가 움직이며 내는 소음 하나하나를 전부 듣고 있었습니다. 저쪽 테이블에 앉은 남자는 아까부터 잘못된 정보를 말하고 있는데 그 정보를 어디서 읽었을지를 생각하고 동시에 카페 스탭들이 교대할 다음 스탭의 출근시간이 늦어지고 있다며 불평하거나 오후에 만날 사람과 볼 영화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를 한다거나 여러 사람의 주문을 한번에 기억해서 주문하는 사람의 주문에 아메리카노 갯수가 틀렸다거나 내 6시방향 두칸 뒤에 앉은 사람이 폰을 들여다볼 때 계속해서 폰을 테이블 위에 툭툭 치는 소리를 내는 등등을 동시에 인식한 나머지 도저히 내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문제는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더 심각해졌는데 저를 고용하는 회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낮은 파티션과 개방된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한 회사에서는 파티션마저 치워버렸는데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시도

이런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일은 해야 했고 청각 방해에 취약한 입장에서 헤드폰은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헤드폰은 노이즈캔슬링만 켠 채로 쓴 다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사람을 무시하면서도 싸가지없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위한 용도로만 동작했습니다.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을 노트에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간단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문장으로 만들어 노트에 적는 겁니다. 그러다가 청각에 의해 집중이 깨지더라도 노트 몇 줄 위로 올라가 다시 읽으며 내려오면 사라진 집중을 다시 복구할 수 있었고 하던 생각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노트에 문장을 그냥 늘어놓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의 단계에 따라 아웃라이닝하듯 들여쓰기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고 더 시간이 흐르자 처음에는 블릿포인트만 사용하다가 생각의 종류와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문단부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청각 방해 속에서 집중이라기보다는 어느정도 생각을 끊지 않고 유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노트는 일종의 뇌의 블랙박스 같은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생산

노트를 디지털화한 다음부터 노트의 물리적인 분량은 더이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서야 하루에 생각하고 작성하는 노트가 수 십 페이지에 달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PDF로 변환해보고 나서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노트를 작성하는 동안에는 이를 알 수 없고 분량에 내가 지치거나 압도당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노트는 내 생각의 흐름을 온전히 담았고 어느 시점이나 주제로 돌아가 결론을 도출한 내 뇌의 동작과정을 확인해볼 수도 있었습니다. 또 시간이 흐르면서 내 뇌의 동작과정이 달라지면 이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또 새로 얻은 정보가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손글씨로 작성하는 노트는 기계화된 검색에 절대적으로 취약하고 페이지를 연결하거나 태그를 달아 분류하는 등의 현대적인 관리방법을 적용하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원노트 앱은 손글씨에도 태그를 붙일 수는 있었지만 제 습관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태그시스템 디자인 자체의 문제였는지는 몰라도 잘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전 노트를 보며 재생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어느정도 기간이 지나면 일하며 만든 노트를 읽으며 알아둘만한 점, 새롭게 드는 생각, 앞으로 하면 좋을 일들을 생각하며 이 생각으로 새 노트를 만들었습니다. 링크를 원활하게 하기 어려운 대신 서로 링크를 걸만한 주제를 연결해머릿속에서 생각하며 동시에 노트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에 만든 노트는 다 쓴 노트처럼 그 자리에 기록은 남아있지만 웬만해서는 다시 찾지 않는 단계로 넘어갔고요. 만약 링크를 남겨뒀다면 모든 노트가 계속해서 유효한 상태로 남아있었겠지만 제 습관은 종이노트에 좀더 가까웠습니다. 재생산된 노트는 다시 또 다른 재생산의 대상이 됐고 결국에는 회사에서 일하며 작성한 노트와 내 생각 과정을 나열한 노트 사이에 구분이 모호해지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며칠 사이에 일하며 작성한 노트 사례

며칠 사이에 일하며 작성한 노트 사례

사례

고해상도로 내용을 공개할 수 없는 점 사과드립니다. 방금 이야기한 대로 내 노트와 업무노트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단계에 이르면 노트는 공개만을 목적으로 재작성하지 않는 이상은 공개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 스크린샷은 지난 며칠 사이에 원격으로 일하며 소음이 없는 내 집에서 일할 때 만든 노트 일부입니다. 실은 이제 소음이 없는 공간에서도 이렇게 생각을 유지하게 됐습니다. 아웃라이너에 적듯 들여쓰기를 하고 글씨가 가지런히 적힌 부분은 청각 등 외부 요인에 방해를 받으면서도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 손과 뇌를 동시에 사용하며 생각한 부분입니다. 줄을 잘 지키지 않고 이리저리 쓴 부분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회의 중에 짧은 단어들을 적을 부분입니다. 후에 노트를 다시 읽고 새 노트를 만들기 때문에 이런 서로 다른 부분을 그냥 노트 하나에 남겨둡니다. 노트를 다시 만들 때 비슷한 주제로 적당한 생각이 모이면 그때 가서 노트를 분리하면 되니까요.

얻은 것

저는 여전히 외부 반응, 특히 청각에 크게 방해를 받습니다. 청각에 의해 생각이 끊기고 멍하니 있을 수도 없습니다. 주변의 모든 소리를 소음으로 인식할 수가 없고 그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그리며 상황을 생각하고 내 의견을 붙이기를 반복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뇌와 손을 동시에 써서 노트를 만들기 시작하고 이 습관이 수 년에 걸쳐 완전히 정착하면서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유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느리게 만드는 꼼수를 쓰지 않고서도 빠르게 생각하며 일할 것을 상상하고 이 속도가 만들어낼 거대한 차이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잃은 것

원래는 '잃은 것'을 윗 문단에서 문단구분 없이 그냥 쓸 작정이었습니다. 뇌와 손을 동시에 사용하며 외부 자극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유지하는 방법은 사실은 생각하는 속도를 손이 움직이는 속도에 맞추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더 천천히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지금의 습관에 큰 걱정거리는 다른 사람들이 머릿속으로만 빠르게 생각하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리라는 점입니다. 주변에서 나는 소리에 뇌를 내맡기고 있으면 확실히 온갖 사건이 빠르게 머릿속을 지나가고 저 분 늦지 않으려면 지금 택시를 미리 불러둬야 할텐데에서부터 시작해 저 라떼에는 아까 휘핑크림 올려달라고 했는데 크림이 없으니 어쩌나 하는데까지 생각이 이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에 집중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저는 순식간에 뒤쳐질겁니다. 아. 그리고 손목 건강을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