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보일러

지난주에는 제주도에 갔었습니다. 지금처럼 멀리 나다니는 일이 나와 나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된 시대에 그렇게 멀리 나가도 괜찮을까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 모든 브레베가 대체 브레베로 전환되거나 완전히 취소된 시점에 이대로 가다가 올 시즌에는 정규 브레베를 단 하나도 못하게 생겼다는 위기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제주200 브레베는 참가자 수가 적은지 대체 브레베로 전환하지 않고 정규 브레베로 진행한다는 공지가 올라왔습니다. 좀 많이 멀기는 하지만 내려가서 조심조심 타고 오자고 결정했습니다. 자전거를 들고 제주로 향했습니다.

출발지와 멀지 않은 숙소를 잡았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캐리어에 자전거를 달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대신 그냥 자전거를 타고 잠깐 이동할 생각이었습니다. 대신 저녁 열시까지는 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 소리를 들어야 했고 밤에는 지상에서 이동하는 비행기들 때문에 바깥 공기가 매케했습니다. 하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습니다. 동네는 비행기 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했고 숙소는 작고 예쁜 골목 어귀에 있었습니다.

작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숙소는 온수를 가스보일러를 통해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스보일러는 여느 가정에 설치되어 있을 법 한 가정용 가스보일러였습니다. 한동안 지역난방이 공급되는 지역에 살다 보니 샤워기로 온수를 켠 다음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가스보일러가 잠시 동안 생소했습니다. 오래 전에는 이런 가스보일러에 잘 적응해 별 문제 없이 따뜻한 물을 잘 꺼내 썼는데 간만에 가정용 가스보일러로부터 따뜻한 물을 받아 샤워를 하려니 아무리 기다려도 온수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동안 한여름에도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사람들의 모임 원로로써 이 배신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다행히 자전거 타는 방법을 한 번 배우면 잊어버리지 않듯 곧 가스보일러로부터 안정적으로 따뜻한 물을 끌어내는 방법을 떠올려 무사히 모임에 배신하지 않고 샤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샤워기 문제

전등 스위치나 아날로그식 볼륨 노브는 한 번에 한 가지 조작만 할 수 있습니다. 켜거나 끄고, 내리거내 올립니다. 반면 샤워기 레버는 두 가지 조작을 레버 하나로 하게 됩니다. 물을 틀거나 잠그는 것과 따뜻한 물과 차가운 물로 조절하는 것입니다. 레버 모양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 두 가지 방향으로 레버를 섬세하게 조절해 적당한 물의 양과 온도를 설정합니다. 물론 이런 섬세하고 복잡한 조작이 그저 길다란 레버 하나로만 되어 있어 이를 조작하려면 레버 전체를 잘 잡고 힘을 조절해야 하지만요.

샤워기 레버는 따뜻한 물 방향으로 레버를 움직여 명시적으로 보일러에게 따뜻한 물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에 비해 가스보일러에 따뜻한 물을 요청하는 인터페이스는 묵시적으로 동작합니다. 따뜻한 물 배관에 물이 흐르기 시작해 임계량을 초과해서 지나가기 시작하면 따뜻한 물을 요구하는 것으로 판단해 보일러를 점화하고 물을 데우기 시작합니다. 샤워기 레버로부터 따뜻한 물을 요구하더라도 충분한 물이 배관을 지나가는데 시간이 걸리고 이를 감지해서 보일러를 켠 다음 배관을 지나는 물이 데워져 샤워기까지 도달하는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또 이 묵시적인 인터페이스 때문에 중간에 물의 양이 변하거나 따뜻한 물 요구량이 달라지만 레버를 통한 요청과는 다른 동작을 하기 때문에 원활하게 따뜻한 물을 사용하기 어렵게 됩니다.

보일러는 단위시간 당 데울 수 있는 물의 양과 물의 양에 따라 데울 수 있는 온도의 한계가 있습니다. 배관에 물이 빠르게 지나가 보일러의 한계를 넘어가면 충분히 따뜻해지지 않은 물이 그냥 배관을 통과한 다음 샤워기에 도달해 저를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하지만 샤워기 레버는 이런 보일러의 사정을 봐 주지 않습니다.

방법

가스보일러로부터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따뜻한 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일러에게 이제부터 따뜻한 물을 사용하겠다고 명시적이고 또 강력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이는 보통 샤워기 레버를 따뜻한 물 방향으로 최대한 돌린 다음 물을 틀면 됩니다. 그러면 배관으로 물이 최대 수량만큼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 정도면 보일러에게 충분핝 의사 표현을 한 셈이고 아마도 보일러는 점화될 겁니다. 하지만 많은 가정용 보일러는 이 최대 수량을 안정적으로 따뜻하게 바꿀 능력이 없습니다. 무슨 법적인 제한이 있거나 아니면 보일러의 근본적인 설계 결함 때문일 겁니다. 따뜻한 물을 사용하겠다는 의사표현을 해서 일단 보일러가 점화되면 최대한 빨리 수량을 조절해 보일러가 감당할 수 있는 양만 흐르도록 조절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데 물을 너무 많이 줄이면 보일러에게 따뜻한 물을 그만 사용하겠다고 선언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보일러에 불이 꺼지고 나면 다시 처음부터 따뜻한 물 사용 선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므로 조심스럽게 수온을 확인해 가며 물을 줄여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신중하게 물을 줄일 경우 보일러가 감당할 수 없는 수량을 오랜 시간 사용하게 되어 따뜻한 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보일러가 꺼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부드럽게 수온을 확인해 가며 샤워기 레베를 조절해 수량을 줄여야 합니다.

이 단계를 무사히 수행했다면 바로 샤워하기에는 너무 뜨거운 물이 예상보다 낮은 수압으로 흘러나오고 있을 겁니다. 이제 보일러는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최대 수량보다 적은 수량을 안정적으로 따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레버를 온도 방향으로 조절해 원하는 온도에 맞춰야 합니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빠르게 조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섬세해야 합니다. 보일러에게 따뜻한 물을 사용하겠다고 의사전달을 할 때 강력한 선언을 위해 최대 온도로 돌려놨던 레버를 서서히 조절해 몸이 벌겋게 데이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수온으로 서서히 내립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내리면 보일러가 이제 더이상 따뜻한 물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보일러가 다뜻한 물을 만들지 않기 시작하는 수량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샤워기 레버는 보일러의 상태를 모니터링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레버를 서서히 조절해 보일러가 헛갈리지는 않되 샤워를 지속할 수 있을 정도의 수온을 유지하도록 섬세하게 조작해야 합니다. 만약 보일러가 꺼진다면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고 그 사이에 나는 추운 샤워부스 안에서 감기에 걸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감기에 걸리면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가스보일러를 잘 다루는 일은 현대에 이렇게 중요한 일이 됐습니다.

정리

이 모든 과정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보일러에게 강력하게 온수 사용 선언을 한다.

  2. '1'의 수량은 보일러가 소화할 수 없으므로 빨리 수량을 낮춰 보일러가 처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절한다.

  3. '2'의 물은 너무 뜨거우므로 수온을 서서히 낮춰 내가 샤워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절한다.

  4. '2'나 '3'에서 너무 빨리 수량을 조절하거나 너무 빨리 수온을 조절하면 보일러가 내 의사를 오해해 온수공급을 중단하게 된다. 이 경우 '1'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숨

오래 전에 이런 동작을 몸에 익혔지만 한동안 이를 사용할 일이 없는 환경에 있다가 다시 이 짓을 하려니 좀 짜증났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쌍팔년도 보일러를 사용하길래 아직도 이렇게 따뜻한 물 쓰기가 어려운가 싶어 대여한 집을 뒤져 보일러 모델 이름을 찾아내 검색해봤는데 의외로 발매한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신형이었을 뿐 아니라 공중파에 광고도 하던 모델이었습니다. 이런 최신 모델마저도 그냥 내 몸뚱이 하나 씻는데 필요한 따뜻한 물을 받기가 이렇게나 힘들다니 실망스러웠습니다. 요즘 보일러는 인터넷으로 제어도 하고 에너지도 절약하고 무슨 안전장치도 있다는데 애초에 가정에서 사용하는 수준의 온수조차 제대로 데워내지 못하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어쟀든 브레베는 무사히 완주하고 이제 평화롭게 이런 복잡하고 섬세한 조작을 할 필요 없이 샤워할 수 있는 세계로 돌아왔습니다. 가스보일러 너무 구리고 짜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