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근무 5일차
평소에 성과가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분들은 원격에서도 높은 업무가시성과 명확한 피드백을 유지했습니다. 채팅으로 이야기할 때는 말로 이야기할 때와 다른 방법을 써야 합니다. 원격으로 일하는 가운데 이를 지탱해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슬슬 익숙해질 부분은 익숙해지고 그렇지 않은 곳은 그런가보다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것도 익숙해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사실상 절망하던 상황에 비하면 제 기준에서는 생각보다 일이 훨씬 잘 돌아갔을 뿐 아니라 회사가 제공한 환경 역시 망분리환경임을 감안하더라도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습니다. 으놀 원격을 진행하며 새로 만든 메모는 없지만 이제 남은 메모를 긁어모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피드백(2)
일하면서 마음속으로 고성과자들로 구분해놓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평소에 의사표현이 명확했고 업무가시성이 항상 높은 상태였습니다. 딱히 본인들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일하는 방식 자체가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기에 더 편하고 더 효율적이며 더 안전한 방식이었습니다. 어쩌면 무대 뒤에서는 여러 가지로 연구하고 있을른지도 모릅니다. 이런 분들과 일하면 신나고 즐겁습니다. 일을 믿고 맡길 수 있고 이 분들의 결정은 딱히 걱정할 필요 없이 수긍해도 대부분 안전합니다. 웬만큼 이상한 문제도 답을 찾아냈고 웬만큼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또 주변 사람들을 절망으로부터 끄집어냈습니다.
이 분들은 원격 상황이 되자 일하기에 더 편한 상태가 됐습니다. 기본적으로 업무가시성이 높아 진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피드백인데 서로 직접적인 가시성이 떨어지므로 어떤 의사전달 수단이든 응답이 빠르고 명확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일하기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시간을 동기화한 협업만이 협업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떤 관점에서는 지난 세기의 조직입니다만 이 상황 속에서는 시간을 동기화한 피드백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이 분들의 피드백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또 질문의 범위를 잘 파악해 정확하게 피드백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처하는 대부분의 상황은 '그렇다'와 '아니다'의 단 두 가지 대답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 기능을 지금 테스트할 수 있는가'란 질문에는 '그렇다' 혹은 '아니다' 중 하나로만 답할 수 있고 이 분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같은 질문에 어젯밤에 늦게까지 데이터작업을 했는데 카운터파트 스탭들이 퇴근해서 문제상황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늘 아침에 왔는데 출입카드를 놓고와서 등등등으로 시작하는 질문과는 동떨어진 대답도 뭣도 아닌 것을 들으며 오르는 혈압을 삭여야 합니다.
말하기
입으로 말할 때와 손가락으로 말할 때는 서로 다른 말하기 방법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동기화해서 협업하는 동안에는 상대의 이름을 불러 주의를 끈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물론 개방된 업무공간에서 이 방법은 내가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사람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집중을 깨는 단점이 있지만 이로 인한 생산성 저하는 회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서로 떨어진 공간에서는 상대적으로 시간을 동기화한 상태로 의사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상대에게 텍스트로 메시지를 보냈다고 해서 상대가 그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텍스트라도 상대의 이름을 불러 주의를 끄는데 성공했다면 주의를 끌고 있는 시간 동안에 의사를 전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스탭들 대부분의 채팅은 일단 주의를 끈 다음 메시지를 몇 분에 걸쳐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의 메신저 앱은 상대가 입력하고 있을 때 이 사실을 이미 알려주고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동안에 이 행동을 상대에게 그대로 전해줍니다. 아무 메시지도 전송하지 않았더라도요. 이제 저는 두 가지 문제로 이 채팅창을 열어놓고 몇 분이고 기다려야 합니다. 일단 상대가 저를 부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간은 기다려야 하고 그 다음은 상대가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제 주의를 계속해서 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상대가 드디어 문장을 완성해 전송하기 전까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상대가 메시지를 타이핑하는 광경을 멀리서 텍스트를 통해 지켜봅니다. 그 끝에 나온 메시지가 '아닙니다. 다음에 출근해서 이야기헤요'라고 할지라도요.
서로 떨어져서 일할 때는 상대와 항상 시간을 동기화해서 이야기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감안해 상대의 이름을 불러 주의를 끄는 대신 처음부터 본론을 바로 이야기함으로써 서로의 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또 긴 메시지를 한번에 만들어내기 어렵다면 다른 텍스트에디터에 타이핑한 다음 붙여넣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시작부터 상대의 주의를 끌지 않으면 첫 번째 완결된 문장을 만들어내는 길고 고된 시간 동안 상대의 주의를 끌지 않은 채로 서두를 필요 없이 느긋하게 문장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상대를 부르기 전에 먼저 본론을 완성하세요.
원격을 지탱하는 사람들
저희 팀이 원격을 수행하는 방법은 망분리환경을 원격에서 접속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회사에 내 컴퓨터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평소와 똑같지만 다만 자리에 사람이 없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원격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누군가의 컴퓨터는 뭔가 잘못됩니다. 응답이 없어지고 원격에서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물리적으로 기계에 접근해서 이 상황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리셋 버튼이라도 눌러 줘야 합니다. 만약 원격을 한다고 해서 회사에 아무도 없다면 원격이 지탱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들보다 더 책임이 많은 누군가들은 여전히 평소보다는 사람이 훨씬 적어 조용할 회사를 지키며 원격으로 일하는데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출근한 사람들의 식사를 만들고 또 누군가는 여전히 사무실을 청소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고 행정업무를 수행하고 이 사람들을 위한 공중위생에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합니다. 이 분들이 우리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늘도 평소와 같이 일해 주신 덕분에 책임이 그분들만큼 크지 않은 우리들이 안전하게 원격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이 분들이 원격 업무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바닥
이제 지난 며칠간 원격으로 일하며 적어둔 메모를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실은 출퇴근시간이 사라져 이 시간을 추가로 일하는데 사용하거나 이 시간에 운동을 했더니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남는 신기한 현상을 경험했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굳이 문단을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예정된 남은 원격 기간은 지금까지 지나간 기간보다 더 짧게 남았고 이대로 안정적으로 일한 다음 모두 안전하게 만나 남은 일을 이어서 진행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