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근무 4일차
원격근무는 그 구성원들에게 개인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디바이스를 갖추도록 강요합니다. 갖추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생산성에 큰 영향을 줍니다. 불가능한 일정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목숨을 담보로 한 생산성 조정과 노동시간 측정은 장기적인 원격근무를 한다면 다시 생각해야 할 겁니다. 망분리환경은 일상적인 휴식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이제 4일째니 굳이 앞부분에 이야기를 하지 않고 바로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해서 원격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일을 하면서 평생 일어날까말까 한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이전과 다른 환경에서 일하는 것으로 넘겨버리기엔 아무래도 아쉽습니다. 자. 오늘은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디바이스에 의한 차별
구성원 개개인이 갖추고 있는 디바이스에 따라 업무효율이 크게 차이납니다. 원격에서 일하기 위해 어떻게 생겼든 컴퓨터가 필요합니다. 그게 윈도우이든 맥이든 태블릿이든 뭔가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스마트폰으로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이전에 일하던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밤을 세워 업데이트해놓고 잠깐 나와서 점심 먹는데 연락이 왔습니다. 뭔가 문제가 일어나서 데이터를 바꿔 다시 패치를 해야 한다고요. 이제서야 몇 숟가락 먹고 있는 참이어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습니다. 한 손으로는 순가락으로 국물을 떠먹고 다른 한 손으로는 폰을 들고 당시 회사에서 제공하는 도구는 아니었지만 혹시나 해서 설치해뒀던 원격 환경을 실행했습니다. 사실 전에도 집에 가다 말고 커밋한 적이 있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거의 서커스에 가까운 조작 끝에 데이터를 올려놓고는 다시 전화해서 테스트해보라고 한 다음 밥을 마저 먹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밥을 남긴 채 회사로 달려가는 걸로 끝납니다만 스마트폰으로 작업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환경에서 매일의 업무를 하기에는 생산성이 떨어집니다. 우리들이 개발에 사용하는 거의 모든 앱은 넓은 화면과 독립된 키보드, 마우스가 있을 환경을 가정하고 개발되었습니다. 이런 앱들을 스마트폰의 작은 - 요즘에는 스마트폰도 결코 작지는 않지만 - 화면으로 원격에서 실행된 모습을 보며 사용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원격에 사용할 이상적인 디바이스는 회사 환경과 거의 동일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구성원이 이런 장비를 갖춘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조립한지 오래된 윈도우 컴퓨터를 사용합니다. 다른 누군가는 원격 데스크탑 접속 환경이 없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오래된 운영체제를 사용하고 있어 회사에서 제공하는 VPN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스마트폰만 가지고 있고 더이상 아무 컴퓨터도 가지고 있지 않기도 합니다. 회사에서 임시로 랩탑을 대여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디바이스의 차이에 따라 업무 효율이 크게 차이났습니다.
엊그제 디스코드를 사용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나마 디스코드 앱을 별도로 설치할 디바이스가 있는 구성원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제 경우에는 더이상 운영체제가 업데이트 되지 않는 아이패드에 디스코드를 설치해놓고 모니터 옆에 매달에 편하게 사용했지만 다른 누군가는 마이크가 달린 디바이스도 없고 스마트폰을 이 용도로 활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업무 가시영역에 아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이 길어지고 개인이 돈을 들여 디바이스를 구매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겁니다. 심지어 평소에 그런 디바이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요. 원격은 구성원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동작하지 않았습니다.
오버워크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추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옵니다만 사실 이 업계에서는 먼 이야기입니다. 먼 이야기였고 지금도 먼 이야기입니다. 그나마 한 주에 초과근무를 최대 12시간까지만 허용하는 법률이 시행되면서 간간히 들려오던 업계 사람들의 자살 소식은 줄어들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정을 변경할 권한이 없는 사람들이 불가능한 일정이 계속해서 변경되는 상황을 반복해서 겪다 보면 우리들 중 누군가 내일 시신으로 발견돼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이 불가능한 일정 속에서 웃을 거리를 찾아내고 짧은 순간이나마 보람을 느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일하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원격으로 업무를 한다고 이런 상황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업무 스타일이 달라지고 업무효율이 달라졌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정은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기존 노동시간은 회사에 앉아 시작하고 회사를 떠날 때 종료하며 중간에 개인 용무로 사용한 시간을 빼서 계산합니다. 가령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9시에 퇴근한다면 회사에 머문 시간은 12시간이지만 점심시간 1시간을 빼고 중간에 병원 갔다온 30분 빼고 저녁식사를 마시는데 사용한 30분을 빼면 실제 인정되는 노동시간은 10시간입니다. 회사에 머물며 보낸 시간 중 밥 먹는 시간, 쉬는 시간 등을 제외한 남은 시간만 인정됩니다. 이런 규칙은 원격근무를 시작하는 순간 서로 곤혹스러운 상태가 됩니다. 언제부터 노동시간으로 인정할 것인가.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내 노동시간으로 요구할 것인가를 합의해야만 합니다. 지금의 규칙은 기존 회사 네트워크 안에서만 할 수 있던 출근, 퇴근, 초과근무신청 등의 동작을 원격에서도 가능하게 하는 겁니다. 장기적으로는 현재의 노동시간 평가 기준을 원격과 같은 상황에 적용할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겁니다.
망분리환경과 휴식
요즘 세상에 망분리환경을 유지하는 경우는 드물어보이지만 저희는 여전히 망분리환경에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힙한 최신 도구를 사용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구글에서 문제 해결방법을 검색한 다음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의 화면을 쳐다보고 망분리된 환경에 텍스트를 하나하나 입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파일로 만들어 별도 승인 받은 전송시스템을 통해 보내는 시간보다 그냥 타이핑하는 시간이 더 짧을 거라고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스크린샷 한 장, 영상파일 하나, 소프트웨어 하나를 전송하려고 해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요즘 소프트웨어들은 인터넷을 통해 인증받는 경우가 많아 이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려면 곤혹스러운 경험을 해야만 합니다. 또 주기적으로 인터넷을 체크하는 소프트웨어는 사용할 수 없고 마지막으로 인터넷에 강하게 의존하는 소프트웨어나 서비스는 완전히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 유행하는 최신 도구나 웹사이트에서 동작하는 이제는 전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오랜 기간 검증된 서비스를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마치 30년 전처럼 개발합니다.
회사가 승인한 모든 메시징 도구는 이 망분리 환경 안에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들고다닌지 10년이 넘어가고 재난알림마저도 인터넷으로 받으라는 압력에 응하지 않는 행동이 게으름으로 표현되는 시대에도 스마트폰으로는 그 무엇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망분리 환경 안에 있는 메신저, 메일, 지라, 퍼포스, 위키, 오피스, 원노트 등등 그 어떤 것에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들에 접근하는 방법은 단 하나, 원격 데스크탑 앱을 사용하는 것 뿐입니다. 메시지나 메일이 도착하면 스마트폰으로 알림 같은 것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회사 안에서도 자기 자리를 떠나는 순간 이 모든 업무의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됩니다. 원격 환경에서는 이 상황이 더 심해집니다. 회사라면 잠깐 커피를 가지러 자리를 떠난 사이에 뭔가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저 멀리 탕비실을 기웃거리는 나를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원격 환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잠깐 방 밖에 나가 물을 마시는 사이에 내가 필요한 일이 생겨도 알림을 받을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내가 직접 컴퓨터 앞을 지키며 벌개진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에 계속
실은 오늘까지 4일째 원격근무를 하면서 생각날 때마다 적어둔 메모가 이제 글 하나 정도를 더 쓸 분량만큼만 남았습니다. 내일 일하다가 또 다른 메모를 하기 전까지는요. 달리 말하면 원격으로 일하며 제가 단기간에 느낀 점은 슬슬 다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오랜 기간 원격으로 일하며 느낀 점, 장기적인 업무설계, 회사와 나 사이의 관계설정, 프로젝트 설계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가 있지만 저와 제 업무환경은 그런 단계까지 경험해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일단 또 내일도 일해보고 또 이야기할 거리가 남아있으면 다른 글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