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감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할만큼 많은 이력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칼 세이건이 외계문명의 수를 산출하는 방법과 비슷하게 내가 받은 이력서가 전체 이력서의 어느 정도 비율이 될지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회사, 또 같은 프로젝트로부터 생각보다 많은 이력서가 나오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습니다.
그 회사는 이전부터 프로젝트를 잘 접기로 유명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접을 때 여느 한국 게임회사와 다르지 않게 팀 대부분을 해고 했습니다. 각자는 회사에 이미 고용되어 있지만 다른 팀에 다시 서류를 내고 다시 면접을 봤고 이 과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회사를 나가야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사람들은 점차 무감각해졌고 으레 프로벡트가 터지면 회사를 나가야 하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가 슬슬 기울어질 느낌이 들면 팀에서 가장 눈치 빠른 사람들은 어느새 행동을 게시합니다. 그들은 프로젝트가 기울어진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고 하는 대신 맨 먼저 프로젝트에서 탈출합니다. 저희들 사이에는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진리로 회자됩니다. 이때 탈출하는 분들은 험한 꼴 안 보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간이 흘러 모두 충돌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목성에 충돌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다들 으레 그러려니 하고 회사를 나갑니다. 다른 팀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다른 회사에 출근하기를 반복합니다. 프로젝트가 터졌든 터지지 않았든 간에 별로 다를 것도 없습니다. 경영에서는 프로젝트를 접는 비용이 놀라울 정도로 낮으므로 프로젝트를 접기까지에 이르는 의사결정들을 어렵지 않게 진행합니다.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의사결정을 반복하지만 이에 대한 견제는 미미합니다. 수 십 명의 모가지가 왔다갔다 하는 동안에도요. 팀원들은 이제 본능적으로 프로젝트로부터 냄새를 맡습니다. 경영으로부터 정보가 내려오지 않아도 귀신같이 눈치챕니다. 회사가 우릴 버릴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들 중 가장 눈치빠른 사람들의 이력서는 이미 접수됩니다. 사람들은 만성적으로 이런 위험부담과 긴장감 속에 살고 있습니다.
프로젝트로부터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프로젝트에 신경을 쓰는 대신 각자의 이력서에 신경을 쓰기 시작합니다. 포트폴리오로 사용할만한 산출물의 퀄리티가 갑자기 요구사항 이상으로 좋아지고 메신저로 서로 바빠서 한동안 이야기하지 않던 분들로부터 메시지가 오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 어떤지를 묻죠. 이 이야기를 끝낸 다음에는 나쁜 냄새를 자욱하게 풍기는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나는 러퍼런스 체크를 했을 뿐이지만 어느새 다음 식사 약속이 잡히고 내 자리도 오락가락하는 상태가 돼버리곤 합니다.
저는 여전히 팀에 이런 일들로 긴장감을 조성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긴장감을 느끼는 순간 경영에서 순진하게 생각하는 대로 프로젝트에 온 힘을 쏟아 이 긴장상태를 완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팀에서 가장 괜찮고 믿을만한 사람들의 이력서는 경영이 별 생각 없이 조성한 -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긴장감을 유발한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만 - 순간 이미 전달됩니다. 가장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이 드문 저녁약속을 잡아 여러 지역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경영에서 예상했던 그대로 프로젝트는 긴장감 속에 좋은 성과를 내는 대신 서서히 무너져갑니다. 경영에서는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판단하는 그 행동 자체가 만든 긴장감을 통해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실패하게 만들고 있지만 아마도 이를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여전히 저는 프로젝트에 긴장감을 일으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효과는 사람들을 멍청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관심이 프로젝트 대신 구직으로 넘어가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