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더스내치
넷플릭스에서 밴더스내치를 봤습니다. 적어도 제 타임라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워하기도 하는 중이었습니다. 인터랙티브 무비 장르가 어디서 갑자기 새롭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대략 10년 이내에 이 장르로 영상이 만들어진걸 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재생을 시작할때는 조금 애를 먹었는데 집에 있는 가장 큰 스크린으로 재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애플티비 두 개가 있었는데 둘 다 지원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2세대인데 이 제품은 꽤 오래 전에 애플로부터 지원이 끝났고 앱 하나하나가 OS 업데이트에 따라 변경되는 구조여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의 넷플릭스 앱을 만든 사람들은 미래에 인터랙티브 무비 장르를 넷플릭스에서 서비스할거라고 예상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5세대도 지원되지 않는다는 점은 상당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쪽은 심지어 애플티비 앱스토어를 통해 OS와 독립적으로 앱을 업데이트할 수 있었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에어플레이 미러링을 포함해서 몇 가지 방법을 시도해봤지만 큰 스크린으로 재생할 방법이 없었고 결국 코딱지만한 아이패드를 바닥에 놓고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장르 영상을 런칭하면서 클라이언트 커버리지가 좀 좁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스마트폰 앱과 스마트티비 앱 지원만으로 클라이언트 커버리지가 충분히 넓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이 에피소드 자체를 파일럿 에피소드로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프로그램은 자신이 인터랙티브 무비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한 내용입니다. 세계는 여러 일종의 평행우주로 구성되어 있고 다른 세계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각각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서로 다른 세계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요. 선택하는 순간은 이전의 경험에 비해 유려하고 그럴싸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제 이전의 인터랙티브 무비 경험은 선택의 순간에 화면이 완전히 정지해버렸거든요. 그대로 놔두고 화장실에 갔다와도 문제없었습니다. 선택에 따라 다음 스토리라인이 조금씩 바뀌고 어느 순간을 결말로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내가 그만두는 순간의 내용이 결말이 되는 셈이었습니다.
제게 가장 재미있는 순간은 계속해서 작중화자가 자유의지 대신 시청자(나)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기를 반복하다가 전화번호를 누르는 장면에서 갑자기 시청자(나)가 작중화자들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부분입니다. 별 생각 없이 전화번호를 눌러놓고 생각해보니 방금 내가 작중화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더라고요.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마치 베르나르베르베르의 신의 끝부분에서 작중인물들에게 독자인 내 존재를 알릴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순간과도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맨 처음 인터랙티브 무비 장르의 영상을 본 건 22년 전이었습니다. 윙 커맨더 4는 출시 당시 장르가 우주비행 시뮬레이션이었습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자면 슈팅에 가깝지만요. 동시에 인터랙티브 무비를 장르 이름으로 달고 있었는데 이 시대에 유행하던 실사 영상을 보는 중간에 선택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트로 영상이 지나가고 술집에서 남자를 도와줄지 말지 선택하는 장면에서 대사를 선택하는 경험은 아 이게 미래의 영상인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선택에 따라 후에 다른 영상 전개와 다른 미션을 경험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 후 20년이 넘도록 작은 시도는 있었지만 뚜렷한 진보는 드물었습니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이번 밴더스내치 역시 기술적으로는 스트리밍 기반에 훨씬 발전한 모바일 기기로 볼 수 있었지만 장르는 딱히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번 영상은 시도한 주체가 넷플릭스라는 점은 이제 이런 장르가 좀 더 많이 등장하게 될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 위에 있는 윙커맨더 4 유튜브 영상에 아쉬운 점은 인터랙티브 무비임에도 영상을 올린 사람이 이미 선택한 진행 이외의 영상을 볼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인터랙티브 무비 장르 영상이 좀 더 늘어나면 유튜브에도 이런 20년도 넘은 영상을 선택하는 경험과 함께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