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의 추억
회사에서 동료들과 문득 사무실의 여러 가지 냄새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리 유쾌한 주제가 아닐 수 있지만 여태까지 일하며 사무실에서 맡았던 여러 가지 냄새를 소개합니다.
먼저 목요일 새벽이면 맡을 수 있는 철야의 냄새. 퍼블리셔는 자사 게임 전체를 매주 목요일 새벽에 점검했는데 우리 역시 이 시간대에 맞춰 업데이트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아직 주 52시간 상한제가 적용되기 전이어서 회사는 업데이트를 준비하고 진행할 인력을 업데이트 시간까지 대기 시킬 수 있었습니다. 전 날 한밤중을 넘겨 간신히 업데이트 예정 기능 대부분이 테스트 서버에서 QA를 통과했지만 이미 택시를 잡아 타고 집에 가기에는 애매한 시간입니다. 집에 가서 잠깐 눈 붙이고 업데이트 시간에 맞춰 다시 출근해야 하는데 집에 가서 씻을 수는 있지만 잠들었다가 일어나지 못하는 대형 사고 위험을 감수하느니 양말로부터 느껴지는 찝찝한 감각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있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회사에는 딱히 잠 잘 만한 공간이 없어 누군가는 불 꺼진 회의실 구석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책상 밑에 간이 침대를 펼쳐 놓고 구겨지곤 했습니다. 저는 차마 사비로 간이 침대를 살 결정을 하지는 못하고 그저 자리 의자에 앉아 등받이를 최대한 뒤로 젖히고 책상 뒷판과 윗판 사이에 좁은 공간에 발 끝을 구겨 넣어 다리를 편 채로 눈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자는둥 마는둥 하는 사이에 새로운 버그가 나타나 이를 수정하기 위해 굳어진 몸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운이 좋으면 업데이트 시작 전까지 잠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사무실 안은 조명을 꺼 놓아 어두컴컴하지만 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서울의 새벽 풍경은 밝고 또 맑았습니다. 창 밖 저편에서 밝아오는 태양은 순식간에 고도가 높아져 더 이상 누추한 사무실을 비추지 않겠지만 책상에서 자다 눈을 떠 바라보는 아침 햇살은 이렇게 또 이번 주의 업데이트를 시작한다는 신호가 되어 주었습니다.
부스스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오면 자고 있을 때는 잘 알 수 없던 사람들의 땀냄새, 발냄새, 머리냄새 등이 뒤섞인 기묘한 철야의 냄새가 무겁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이 냄새의 원인이자 이 냄새의 일부입니다. 업데이트를 진행하고 점검이 끝나기 전에 고객들이 게임에 접속해 오기 전에 라이브 서버에서 테스트를 진행하며 이 철야의 냄새를 잊어버리곤 하지만 업데이트가 마무리되고 모니터링을 무사히 넘긴 다음 회사 밖에 나가면 철야의 냄새가 나를 계속해서 따라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최근 많은 국민들의 성원 속에 주 52시간 상한제가 폐지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냄새를 다시 맡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다음은 자정을 넘긴 야근의 냄새. 야근은 종종 자정을 넘겨 새벽을 향해 이어집니다. 한창때는 낮 시간에는 의사결정에 필요한 모든 사람을 한데 모을 수가 없어 밤 11시에 회의를 잡기도 했습니다. 자정을 넘어 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마지막 식사로부터 점점 멀어져 허기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시간에 배달 되는 메뉴는 뻔합니다. 지금 상상하셨을 야식 메뉴 이외에 사람이 일상 생활을 하며 식사로 먹을만한 메뉴를 주문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별 고민 없이 주문 담당자의 결정에 따라 치킨, 족발, 보쌈 같은 메뉴가 배달 되어 옵니다.
이런 메뉴는 보통 커다란 용기에 여러 사람 몫이 함께 담겨 있어 한 자리에 모여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별도로 휴게 공간이 없어 큰 회의실에 모여 먹곤 했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한바탕 야식을 먹고 나면 회의실에 냄새가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때때로 야식에서 떨어진 기름이 바닥 구석 어딘가에 남아 산폐되어 두고두고 묵직한 냄새를 내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큰 회의실에선 자정을 넘긴 야근의 냄새가 났는데 이 냄새는 좀 더 생생해졌다가 좀 더 탁해졌다를 반복했을 뿐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쓰레기통으로부터 올라오는 튀긴 가난의 냄새. 한번은 스폰서가 처한 지금으로는 알 수 없는 어떤 문제 때문에 임금이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회사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 임금 체불이 정상화된 다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 탈출 버튼을 누르는 대신 회사에서 버티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의 저금은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고 많은 사람들이 점심을 나가서 사 먹는 대신 도시락을 싸 오기 시작합니다. 집에 가서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설거지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회사에서 설거지를 하곤 했는데 기묘하게도 무심코 설거지 하는 내 옆에 자기 도시락통을 놓고 가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뭐 겸사겸사 내 설거지 하는 김에 그 통들도 닦아 두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개개인이 도시락을 준비하기에도 돈이 부족한 날이 찾아왔고 당시 최고 책임자 카드로 근처 한솥도시락에서 점심을 사 먹기 시작합니다. 설거지를 안 해도 되니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주요 메뉴가 모두 튀김으로 구성된 한솥의 특성 상 며칠만에 질렸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은 없었습니다. 한솥을 먹거나 내 돈으로 식사를 마련하거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었지만 출근할 차비 한 푼이 아까운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모두가 한솥을 싫어했지만 모두가 한솥을 군소리 없이 먹는 상황이 됩니다.
한솥을 먹고 포장을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버렸는데 튀김이 메인인 한솥 반찬의 특성 상 기름이 산화하면서 특유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식사시간이 지나면 쓰레기 봉투를 묶어 내놓곤 했지만 이내 쓰레기 봉투를 살 돈도 부족해져 최대한 쓰레기를 많이 넣어 내놓게 됩니다. 그래서 사무실에는 한솥도시락 튀김 반찬 기름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통이 며칠씩 방치됐고 이 냄새는 지금도 튀긴 가난의 냄새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썩 상쾌하지는 않은 냄새를 소개했다면 이번에는 냄새 자체만으로는 꽤 상쾌하고 기분 좋은 냄새를 소개하겠습니다. 이전에 어떤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대신 3분카레나 3분짜장 같은 간편식을 낮은 가격에 판매했습니다. 식사 대부분은 주변 식당에 나가서 사 먹었지만 멀리 까지 나가기 귀찮거나 돈을 아끼고 싶은 사람들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간편식을 제공할 뿐 간편식이 함께 먹도록 고안된 밥을 제공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밥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한동안은 햇반을 사용했지만 누군가 회사에 전기밥솥을 들고 오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어느 날 전기밥솥과 함께 쌀, 김 같은 밑반찬들이 회사 냉장고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출근해 사무실에 들어오면 나보다 먼저 출근한 전기밥솥의 주인이 올려 놓은 쌀이 익으며 내는 갓 한 밥냄새가 공간을 가득 매웠습니다. 지난 수 십 년에 걸쳐 아침식사를 하지 않지만 이때 만큼 아침 식사 욕구를 강하게 느낀 적도 드물었습니다. 이 밥솥 덕분에 회사에서 제공하는 간편식을 이용해 돈을 제법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건강에 좋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나이가 훨씬 적어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냄새 몇 가지를 소개해봤습니다. 이 글을 자정을 넘긴 시간에 쓰고 있는데 이전에 다른 냄새를 소개할 때는 괜찮았지만 이른 아침 사무실을 가득 매운 갓 한 밥냄새를 생각하니 햇반이라도 하나 돌려 그냥 퍼먹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