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가 터지던 날
2021년 여름 남박사님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습니다. 쓰고 계시던 책에 인터뷰를 싣고 싶다고 하셨는데 나중에 가서 인터뷰에 참여하신 다른 분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 때 진행한 인터뷰는 게임 기획자의 일의 끝부분에 실렸는데 이는 편집부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고 합니다. 책의 시작과 끝은 당연히 저자의 글이 장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글을 만들어 오신 분들의 감을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책이 출간되고 시간이 흘러 몇몇 경로를 통해 이 끝 부분에 대한 의견을 접하게 됐는데 어느 날 저녁에 내가 포함된 사건과 내 행동,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무겁게 읽히고 있지 않은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오프라인에서도 이 부분을 읽은 분이 적당히 시나리오 기획자의 여러 가지 일에 대해 배우다가 끝에서 갑자기 코스믹 호러로 끝난다는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 역시 자난 곰인형에 대한 부연처럼 부연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프로젝트가 터지던 날 이미 분위기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회사에서는 프로젝트가 저조한 성과를 내고 있다고 판단해 한 달 정도 시간을 줬고 그 안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면 프로젝트를 드랍하겠다고 선언한 상태였습니다. 그 한 달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탈했고 마지막 날에는 이미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는데 실은 그때까지도 도탑전기를 복제해 기능을 만들고 있었던 것은 맞습니다. 이 때 상황을 회사 입장에서 본 이야기가 어떤 책에 소개되기도 했는데 이걸 읽어 보려고 저 책을 살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하면 제가 빌려드립니다.)
아침부터 높은 분들이 자기들끼리 회의실에 들어가 뭔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 하고 있어 오늘 쯤일 거라고 예상하고 팀에서 문서 작성에 사용하던 원노트 첫 페이지에 이미지를 검색해다 붙였습니다. 이미지를 붙여 놓고 페이지를 띄워 놓고 그 밑에 오늘 할 일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회의실에 있던 높은 분들이 밖으로 나와 사람들 각각에게 회사의 결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판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청계산 밑 어딘가의 고깃집에 가서 점심부터 고기를 먹었을 겁니다. 누가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내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기획에서 내일부터 할 일은 지금까지 제작한 문서와 관련 자료들을 회사에서 가져가기 좋은 모양으로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위 이미지는 회사에서 보기에 좋은 모양은 아니었으므로 다른 이미지로 바꿨지만 그 역시 그리 유쾌한 이미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이제 이 일을 하는데 보낸 2년은 이력서 상에 글자로 나타날 뿐 이를 쉽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회사가 어느 정도는 눈 감아 주는 가운데 몇몇 문서를 각색해서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문서들이 가지는 의미는 프로젝트를 완수했을 때에 비해 한 없이 작습니다.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온갖 일을 겪으며 갈고 닦아 온 바이너리 덩어리는 이제 더 이상 실행 될 일이 없는 그야말로 디지털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데이터를 커밋하고 퍼포스가 잠기며 업데이트가 불가능해지는 시점이 왔습니다. 원노트 문서를 정리해 위치를 회사에 메일로 보내고 오랫동안 퇴근할 때도 종료하지 않던 윈도우를 종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인터뷰 끄트머리에 이런 경험들이 나를 파괴하려 들고 나는 이런 내 일에 대항해 살아가야 한다고 썼습니다. 한동안은 프로젝트를 완수하지 못하고 종료 당하는 경험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 때는 프로젝트 종료가 팀원 개개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모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전에 경험한 프로젝트 종료 중에서도 가장 유쾌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일로 인한 감정적인 상처는 별 일 없다고 말하곤 했지만 제법 오래 남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문득 내 일이 나를 파괴하려 드는 이상한 세계를 정의한 것은 사실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업데이트 할 수 없는 형상관리도구 저편에 남겨진 바이너리 덩어리는 실제로는 회사 어딘가에 있는 서버에 남겨진 전기 신호일 뿐입니다. 그걸 만들며 짧지 않은 기간에 걸쳐 신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심혈을 기울였지만 그 정도 만으로는 시장과 회사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그 전기신호들은 내 정신을 파괴하기 위해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기디스크 위의 신호들로써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그 신호에 감정을 기울이며 고통 받는 건 앞으로 이 일을 업으로 삼아 살아갈 스스로에게 올바른 접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송스럽게도 이 업을 계속하는데 관심을 가질 분들께 이런 음울한 이야기를 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프로젝트 종료는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적으로 런칭한 몇 안되는 프로젝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프로젝트가 이력서 상의 한 줄로 남겨집니다. 이런 이벤트 하나하나에 정신이 파괴될 위기를 겪는다면 결코 오래 버틸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경험을 이겨내야 하거나 버텨내야 하난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 역시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그냥 일어날 수밖에 없고 누군가는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출근하다가 어제 내린 빗물로 가득한 물웅덩이를 밟았다고 해서 내 정신이 파괴되지는 않습니다. 그냥 출근해서 양말을 벗어 어딘가에 말려 놓고 제발 퇴근할 때는 신발과 양말이 말라 있기를 바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내가 기울인 신체적, 정신적 심혈은 프로젝트가 완수되지 못하고 중단될 때 상처를 조금 남겼지만 이를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성공할 때 환희를 느낄 수 없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오래도록 이 일을 해내기 위해 이런 경험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