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신뢰 신호
어느 날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스팸이라고 하기에는 내 이름과 주요 신상 정보를 정확히 알고 있었는데 그럼 피싱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읽어보니 기존에 가입했던 보험 회사가 다른 회사에 피 인수 되어 담당자가 변경되었는데 내가 바로 그 담당자이니 한 번 만나서 이야기 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모든 정보가 일치했고 적어도 당장 무슨 앱을 설치하라든지 어디에 입금하라는 내용은 없는 것으로 미루어 피싱은 아닌 것 같아 보여 회신했습니다. 어느 날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정장을 차려 입은 두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나에게 연락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의 상사라고 소개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머리 모양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비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장례식에 갈 때 입는 언제 산 건지 기억나지도 않는 싸구려 검은 정장보다는 더 좋은 정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반짝이는 시계와 반지 같은 장신구가 눈에 띄었고 또 잘 닦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분명 평소에 잘 신고 다녔을 것 같은 구두도 눈에 띄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도통 보기 어려운 가죽 서류가방과 클리어파일에 잘 정리된 인쇄물, 그리고 인쇄물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는 책갈피용 포스트잇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를 만난 이유는 이전에 내가 가입한 보험이 회사의 피 인수를 통해 다른 회사의 보험이 되었음을 안내하고 새 회사에서 내 개인정보에 접근하기 위한 권한을 획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는 김에 내가 가입한 보험들을 평가해 새 회사의 다른 계약을 권했습니다. 핵심은 이전에 내가 보험에 지불하던 금액과 거의 같으면서도 장기적인 비용이 급격히 증가하지 않으며 이전 계약에는 없는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매달 같은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계약 갱신에 따른 비용 증가가 없고 또 실제로 나에게 문제가 생길 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한편 마음 속에서는 만약 이 분의 주장대로라면 회사에게 이득 될 것이 없을텐데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의심스럽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런 설명을 듣고 보험을 비교할 수 있는 두툼한 인쇄물을 받은 다음 헤어졌습니다. 대대로 보험 설명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고 항상 안내문은 두꺼우며 무슨 일이 일어날 때 무슨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눈에 들어오게 정리하질 않는 것 같습니다. 게임에서 퀘스트 달성 조건과 보상을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면 진즉에 쫓겨났을 겁니다.
핵심은 내 갱신형 상품을 종신형 상품으로 변경하는 것입니다. 갱신형 상품은 몇 년에 한 번 씩 내 나이에 따라 보험료를 재평가하는데 나이가 늘어날수록 보험료가 급격히 증가하므로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이를 갱신하지 않는 형태의 계약으로 변경하는 것이 그리 잘못된 제안은 아닌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한편 이런 보험은 화폐가치 하락을 반영하지 않으므로 종신 보장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보장이 필요한 시점에는 화폐가치가 하락해 의미 없는 보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에 한 번 씩 갱신하는 보험에 비해 지금부터 다시 20년에 걸쳐 납입해야만 보험 효력이 생긴다는 점 역시 지금 시점에 와서는 썩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먼 미래에 이런 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먼 미래를 지금부터 준비할 때 화폐가치 변화에 대응하지 않는 상품에 가입한다면 보험료는 현재 가치 기준으로 납부하고 보장은 미래 가치 기준으로 받아 지금 보험료를 내기는 힘들고 미래에 보장은 어처구니 없는 수준으로밖에 받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또 미래에 보장을 통해 어느 정도 삶의 질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은 나이가 들면 원래 아픕니다. 거기에 많은 돈을 들여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올바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적극적인 대응을 위해 현재 가치 기준으로 돈을 부담하는 것이 올바른 결정일지 역시 의문입니다. 아무 판단도 하지 않고 헤어졌고 내게는 두꺼운 종이뭉치가 남았습니다. 이걸 상세히 들여다보기는 해야 하는데 계속해서 미루고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너무 두껍습니다.
한편 위에서 잠깐 설명한 이 분들의 겉모습과 말과 행동으로부터 묘한 느낌을 받았는데 마치 이전에 이야기한 쎄함의 과학과도 비슷했습니다. 과거와 달리 현대의 보험설계사들이 적극적으로 고객을 기만하려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업계에서 장기적으로 살아남으려면 고객들의 신뢰를 얻어야 할 테니까요. 한편으로는 이 분들이 사방으로 내뿜고 있던 전통적인 신뢰를 얻으려는 신호가 내 관점에서는 거의 대부분 동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재미있었습니다. 잘 다듬은 머리 모양과 정장 차림과 두 명의 등장과 잘 정리된 서류를 담은 가방과 구두와 장신구들은 분명 전통적으로 신뢰를 주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신호들은 내게 이분들이 하는 말을 도통 신뢰할 수 없다는 신호로써 작용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정장을 잘 차려 입은 사람이 내게 뭔가 제안할 때 이 경험이 내게 유리한 적은 드물었던 기억입니다. 내가 뭔가를 구입하거나 계약하기를 원할 때 상대는 최대한 잘 차려 입고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할 만한 내용을 자신의 속도에 맞춰 설명하곤 했습니다. 또한 잘 정리된 서류뭉치에 비해 손에 잘 익어 익숙하게 다루지는 못하는 태블릿과 이 과정을 오가는 손놀림 속에 보이는 어색한 장신구들은 이들이 가지는 전통적인 신호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신뢰를 가지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분들의 신호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적절했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실패한 신뢰 신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