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키 문제
지난 주에 드디어 애플 매직키보드가 배송되었습니다. 아이패드와는 별도로 배송되었기 때문에 케이스 없는 아이패드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제조사 주장으로는 아이패드는 여러 가지 충격을 적당히 견딜 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했지만 이미 지난 세대 아이패드가 여러 환경에서 휘어지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번 세대 아이패드는 지난 세대에 비해 이 문제에 한해서는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튼튼한 케이스 없이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다른 책과 함께 가방에 들어가는 것도 금지됐습니다.
매직키보드는 이 상태를 한번에 해결했습니다. 수많은 리뷰어들로부터 이미 알려진 대로 엄청나게 무거웠습니다. 키보드를 상자에서 꺼낼 때 까지만 해도 이정도는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키보드만 들었을 때 이야기였고 이 물건을 언제나 아이패드와 함께 들고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내는데까지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이패드에 장착해서 아이패드가 바닥에서 대략 1센티미터쯤 떠있는걸 아무 감각 없이 지켜보다가 키보드 째로 들어올렸을 때 느껴진 '이게 뭐야' 하는 감정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케이스를 접어 손에 들자 이건 웬만한 전공책보다 더 무거웠습니다. 회사에 들고 가 동료분들께 들어보게 하다가 문득 다른 분의 그램 노트북을 들어보고 이건 거의 아이패드의 절반 무게로 느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아이패드를 들고다니는게 아니라 무슨 둔기를 들고다니는 느낌이었습니다. 밝은 면만 보면 이 키보드 케이스와 함께라면 아이패드는 절대로 휘어지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키보드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아이패드보다도 더 휘어짐에 강할 겁니다. 하지만 어두운 면을 보자면 한국은 둔기소지가 합법인 국가가 되었습니다.
리뷰어들이 매직키보드는 5열로 설계되어 ESC
키가 없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무슨 빔 에디터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ESC
키를 얼마나 사용하겠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리눅스에서는 나노 에디터를 사용했고 나머지 모든 데스크탑에서는 5열로 구성된 HHKB를 사용했습니다. HHKB는 매직키보드와 똑같이 5열이었지만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직키보드의 배열에 불평하는 리뷰어들을 보며 좀 유난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매직키보드를 사용하고 나서 4일이 지난 지금 이제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빔을 사용하든 말든 ESC
키는 본능의 일부라고요. 가령 아이패드에서 커맨드 + 스페이스
를 눌러 스팟라이트 검색 인터페이스를 꺼냈습니다. - 아이패드에서도 이 화면을 스팟라이트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검색을 해본 다음 이 인터페이스를 그냥 닫을 생각으로 저는 본능적으로 1
왼편의 틸드 키를 눌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검색 텍스트박스에 ₩
문자가 입력됐습니다. 심지어 틸드 키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스팟라이트 인터페이스를 닫기 위해 커서를 움직여 취소 버튼을 클릭하거나 직접 속으로 화면에 있는 취소 버튼을 터치하거나 아니면 커맨드 + 스페이스
키를 다시 눌러야만 했습니다.
그때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빔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화면에 나타난 뭔가를 닫거나 취소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ESC
키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HHKB
는 5열 키보드이지만 1
왼쪽에 ESC
키를 배치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틸드 키는 1열 맨 오른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일할 때 언리얼엔진의 콘솔을 불러내려면 1
왼쪽에 있는 키가 아니라 1열 가장 오른쪽에 있는 키를 눌러야 합니다. 1열 오른쪽 끝에 틸드 키가 있는 대신 백스페이스 키는 그 바로 아래인 2열 오른쪽 끝에 있고요. 누군가는 이 백스페이스 위치가 이상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이 배열을 오랫동안 사용해온 입장에서는 이제 뭐가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둘 다 이해합니다. 일단 ESC
키가 없으면 불편합니다. 저는 이 키를 눌러 뭐든 닫거나 취소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백스페이스가 2열에 있는 HHKB가 흔한 배열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다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1열의 1
왼편에 ESC
키가 있는 배열을 고를 겁니다. 매직키보드는 5열 키보드이면서 ESC
키가 없고 불편한 것 맞습니다. 안전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회피하려고 틸드 키와 백스페이스 키 위치를 조정한 HHKB의 배열은 흔하지는 않지만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