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크컴퓨터비즈니스
모험 실패
지난주에 트림원 바이크컴퓨터 사용기를 작성한 다음 다른 사람들이 작성한 사용기가 있을지 검색해봤습니다. 결과 대부분은 광고성 게시물이었는데 일부는 아직 제품을 사용해보기도 전에 제품 겉모양과 주요 화면 사진을 올려놓고 앞으로가 기대된다고 하는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별 도움이 안 됐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자전거동호회 게시판에서 바이크컴퓨터를 잘 만드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의문을 가지는 글을 봤습니다.가민이나 와후가 만드는 기계를 보면 그리 훌륭하지 않은데 이런 기계는 간단히 생각하면 GPS센서를 비롯한 몇몇 센서를 내장하고 이들의 값을 기록해 fit 파일로 뽑아주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왜 이리 문제가 많은 제품이 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불만
사실 지금 주력으로 사용하는 가민 엣지 바이크컴퓨터는 사용할수록 불만이 쌓여 갑니다. 지난 퍼머넌트에는 완주를 얼마 안 남기고 짧은 터널 하나를 지나는데 코스가 먹통이 돼버렸습니다. 코스 시작부분과 끝부분은 보통 시내주행인 경우가 많아 코스파일을 참고하지 않기 곤란했습니다. 다행히도 함께 주행한 동료의 똑같은 가민 기계는 같은 상황에서 먹통 상태가 풀려 별 일 없이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만 제 가민은 거의 끝날 무렵에야 코스를 다시 참조할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신호대기할 때 기계를 껐다 켜서 정상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코스 기능은 누구나 상상하는 자동차용 내비게이션의 아름다운 턴 바이 턴 내비게이션과는 거리가 먼 오픈스트리트맵에 코스 궤적을 보여주고 이탈 경로를 띄워주는 수준일 뿐입니다. 프로필 개념은 GPS센서를 제어하고 데이터스크린 종류를 자동으로 변경해주지만 또 센서를 변경해주지는 않습니다. 인도어 트레이닝을 할 때도 계속해서 자전거 뒷바퀴에 달린 속도센서를 검색하고 배터리 1%가 아쉬운 장거리라이딩에서는 인도어 트레이너를 찾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나마 개선됐지만 코스 파일을 집어넣으려면 컴퓨터에 연결해서 GPX 파일을 수동으로 복사해야 했고 2백킬로미터가 넘는 큰 코스파일을 로딩할라 치면 이게 기계가 멈춘건지 아니면 그냥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습니다.제조사에서 담아주는 맵은 또 어떤가요. 전 세계를 길 몇 개로 축소한 실제 주행에 아무 도움이 안되는 맵이 기본으로 들어있어 맵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기능이 없는 수입사에서 제공하는 맵을 사용하거나 오픈스트리트맵을 적당한 파일 크기로 잘라주는 서비스를 사용해야만 합니다. 맵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회사들의 지도에 비해 우울한 수준이지만 그거라도 없으면 우리는 간신히 전국의 고속도라만 표시된 수준의 맵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이런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가민 기계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이유가 있긴 합니다. 일단 이 비즈니스를 거의 처음 만들어낸 회사 중 하나이다 보니 지금까지 긴 시간에 걸쳐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덕분에 바닥부터 시작하려고 보면 막막할 법도 한 싸이클링 다이나믻그나 프로필 개념, 데이터필드 구성 같은 기초적인 구성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너무 당연한 기능 같지만 정작 다른 기계에는 쉽게 누락돼있습니다. 또 같은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기도 쉬운 편입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가령 장거리 라이딩 후 저장하려다가 그대로 기계가 벽돌이 됐을 때 당황하지 않고 파일시스템에서 삭제 플래그가 붙은 임시 파일을 복원해내는 것은 아마도 가민 기계 사용자가 더 적었다면 얻기 힘든 도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애초에 기계가 먹통이 되지 않았어야 하지만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위에서 이야기한 바이크컴퓨터를 더 잘 만들어낼만한 회사가 없을지 의심해보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트림원 바이크컴퓨터의 꼴을 보며 이 비즈니스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슬슬 4년째 써 오고 있는 가민 엣지 520의 교체주기가 앞으로 한 두 시즌 안에 돌아올 것 같은데 아마도 높은 확률로 다시 가민 기계를 살 겁니다. 이유를 나열해보겠습니다.
요구사항
일단 하드웨어부터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GPS센서, 기압계, 나침반, 온도센서, 무선모뎀, 무션센서, 주변광센서, 스토리지, CPU, 배터리를 적당히 작은 공간에 밀어넣은 기계를 상상하는 것은 간단할 법도 합니다. 여기에 이 기계는 지속적인 진동을 견딜 수 있어야 하고 낙차 같은 강한 충격으로부터 망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또 기온 범위보다 더 넓은 온도 범위에서도 동작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너무 무겁지는 않아야 합니다. 잠수 수준의 방수기능은 필요하지 않지만 폭우 속에서도 동작해야 하고 연속으로 며칠씩 - 적어도 90시간 - 동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최소한의 하드웨어 요구사항입니다.
또 요구사항
다음은 소프트웨어인데 일단 이 장치를 구동할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합니다. 라이딩을 시작하고 종료하고 랩을 기록하고 현재 위치를 지도 위에 표시하고 현재 주행 궤적과 구간정보를 항상 비교해 구간에 진입하면 별도로 시간을 측정하고 여러 센서로부터 얻은 정보를 화면에 표시하되 중간에 센서와 통신이 끊기거나 잘못된 값이 입력될 때 이를 곧이곧대로 화면에 표시하지 않고 적당한 값을 실시간으로 추측해야 합니다. 사용자가 필요한 값을 화면에 표시하도록 화면 구성을 변경할 수 있어야 하고 표준을 잘 준수하지 않지만 묘하게 사용자가 많은 이상한 센서를 잘 지원해야 합니다. 때로는 다른 회사에서 만든 하드웨어의 특정 펌웨어 리비전에서 발생한 문제를 바이크컴퓨터 수준에서 해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또 또 요구사항
여기에 세월이 흘러 스마트폰과 연동기능이 필요해졌습니다. 스마트폰으로부터 날씨를 받아 표시하고 전화나 텍스트메시지를 표시해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종료된 라이딩을 기록하고 실시간으로 함께 라이딩하는 사람들과 떨어진 거리를 표시하고 기록을 온라인에 업로드하고 온라인으로부터 사용자가 관심있다고 표시한 구간정보를 실시간으로 다운로드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능을 하는 앱은 적어도 아이폰과 안드로이드폰용으로 각각 개발해야 하고 다른 서비스에 연동하려면 앱과 다른 서비스 사이를 이어주는 웹서비스를 개발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스트라바처럼 고도정보를 보정하기 위해 별도의 지리정보데이터를 운용해야 할 수도 있고 가민커넥트처럼 같은 장비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단순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만들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
적어놓고 보니 확실히 그리 간단한 비즈니스는 아닙니다. 바이크컴퓨터 하드웨어와 그걸 구동할 소프트웨어를 한 벌만 만들면 진입할 수 있었던 비즈니스였던 시대가 분명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현대의 바이크컴퓨터비즈니스는 생각보다 많은 플랫폼에 걸쳐 생각보다 많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하고 여기에 생각보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합니다. 이걸 단기간에 따라잡기는 쉽지 않습니다. 얼마전에 받은 한국 회사의 바이크컴퓨터는 엉망이지만 그렇게까지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이 비즈니스가 그리 쉽게 기존 업계를 따라갈 수 있는 비즈니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번 시행착오를 통해 앞으로 바이크컴퓨터를 구입할 때 좀 더 보수적인 시각으로 기계를 알아볼 겁니다. 이런 소비자의 시각까지 다해져 이 비즈니스는 정말로 쉽게 진입할 수 없는 곳이 되겠다 싶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