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공도주행
가끔 자전거를 타고 서울시내에 들어갈 일이 있습니다. 웬만하면 자전거도로 위주로 다니지만 자전거도로가 시내 곳곳까지 연결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공도에 들어갈 때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웃긴 글자를 바닥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자전거우선도로'라는 글자입니다. 자전거 그림도 그려져 있고요. 그런데 그냥 도로 위에 페인트만 칠해놓은 거라 무슨 기능인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자전거우선도로는 여느 자전거도로처럼 자전거도로망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았고 자동차는 내 앞뒤로 똑같이 달렸습니다. 똑같이 나를 스쳐 지나갔고 똑같이 내게 경적을 울렸고 똑같이 내 앞을 가로질러 우측 차로로 진입했습니다. 자전거도로는 확실히 서울 시계를 지나면 좋아집니다. 과천 근처 자전거도로처럼 만들기 싫은걸 억지로 만들어 1미터도 안되는 폭에 양쪽 차선을 그려놓은 '만들기싫으면만들지마그냥' 자전거도로에 인류애를 상실했다가도 한강에 가까워지고 서울시계를 넘어가면 자전거 세 대가 병렬주행해도 괜찮을 정도로 넓어지는 자전거도로에 다시금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물론 가끔 정말로 세 대가 병렬주행하는 꼴을 보면 좀 곤란하긴 합니다만.
자전거우선도로는 그렇게 눈에 띌 때마다 하루 일과에 지친 마음을 조금은 웃겨 줍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공해 없는 교통수단을 홍보하는 행동은 하고싶고 그렇다고 실제로 자전거가 거리에 나와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고싶지는 않고 또 그렇다고 자전거도로망을 확충하는데 돈도 쓰기 싫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페인트통을 집어들고 공도 한쪽에 자전거 그림을 그리는 것 밖에 안 남습니다. 자전거우선도로는 아무 기능도 없습니다. 그 자전거우선도로끼리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기존 도로망과 차선이 정리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도로망 간의 연결은 고사하고 우측 도로가 나타나면 아무 준비도 없이 그냥 끊깁니다. 큰 도로에서 바깥차선으로 주행할 때 이런 우측 도로를 직진하는 요령은 왼손으로 수신호하고 바깥차로의 중간으로 나온 다음 - 중간으로 안 나오면 진출하는 뒷차가 나를 깔아뭉갤테니까 - 그대로 직진하는 겁니다. 하지만 서울시내의 자전거우선도로 (피식) 는 항상 자동차로 가득하고 내 왼손 수신호에 관심을 가지는 차량도 없습니다. 내가 차로 중앙으로 나오면 0.0001초 안에 뒷차가 상향 켜고 경적을 울립니다. 자전거우선도로요? 자전거운전자들에게 웃음을 주려고 칠해둔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차라리 지하철 유리벽에 붙은 웃긴 시를 적어두는 쪽이 더 효과적일겁니다.
야간에 하이비저빌리티재킷 (aka 형광바막) 을 입고 달리는 이유는 자동차 불빛에 가시성이 좋기 때문입니다. 차에 잘 보이면 차들이 날 보고 적당히 운전해줄 거라고 예상하기 때문인데요, 가끔은 그렇고 가끔은 안 그렇습니다. 가령 자전거 운전자가 보이면 적당한 폭을 유지하고 지나가는 차량이 일부 있는 반면 대부분은 오히려 더 가까이 붙어 지나가거나 나를 도로 밖으로 밀어내며 (실제로 스치고 지나감) 지나갑니다. 오히려 내가 검은 옷이나 광학미채라도 입고있었으면 원래 지나가던 대로 도로 중앙으로 지나갔을텐데 하이비저빌리티재킷을 걸치고 있으니 오히려 더 정확히 위협운전을 당했습니다. 한번은 인스타그램에 볼보에서 개발했다는 사람한테 무해하고 그래서 사람한테 뿌리는 형광반사스프레이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밤중에 도로에 나가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양인들이 와 이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하는 답글로 도배되는 찰나 또 다른 양인 한 명이 우리는 반사조끼에 전조등에 후미등에 발목띠에 헬멧 뒤에 후미등도 붙이면서도 항상 위협당하는데 이제는 몸에 스프레이질까지 하라는 거냐며 광분하는 답글을 남겼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전거우선도로로 시작된 줄 알았던 멍청한 자전거정책이 서울시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입니다.
서울시에서는 일년에도 몇 번씩 여기 저기 도로를 막아가며 자전거 행사를 합니다. 예쁘게 분 단위로 교통통제한 다음 널직한 길에 콘과 경찰을 쭉 깔아놓고 사람들을 달리게 합니다. 그런데 어쩌죠. 평소에는 예쁜 콘도 경찰도 없는데요. 그렇게 거리에 자전거를 가지고 나와도 괜찮다고 사람들을 속이고 아무 후속대책 없이 바닥에 페인트질만 해놓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습니다. 개인적인 제안은 그 자전거행사를 한번 교통통제 없이 해보는 겁니다. 원래 규칙대로 자전거가 공도주행하는 규칙에 맞춰 행사를 진행하는 겁니다. 평소대로 신호도 지키고 평소대로 바깥 차로 오른편으로 주행하고 좌회전은 훅턴하고 직진은 우측차로의 우측에서 대기하고요. 그렇게 달리다 보면 내 앞으로 정확히 끼어들어 정차하는 택시, 날 스치며 (정말 스치며) 지나가는 버스, 자전거를 길 밖으로 밀어내며 운전하는 트럭, 직진신호에 내 앞으로 우회전하는 차량과 마주친 사람들이 겁먹고 그 자리에 자전거를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런 꼴을 봐야 도로에 페인트질 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까 싶습니다.
뭐.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또 그렇게까지 못할 건 아닙니다. 시내를 자전거로 이동하는건 위에 시니컬하게 한 이야기 속 경험만큼 그렇게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바닥에 페인트질을 볼 때마다 이 페인트가 올바른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