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맵을 보며 드는 감정

다른 회사에서도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전에 참여했던 몇몇 프로젝트에서는 프로젝트 초반에 ‘비전 피티’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경영진을 대상으로는 일단 뭔가를 추진하는데 동의를 얻어 팀을 꾸리는데 돈을 사용하기 시작하지만 팀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명할 만큼 예쁘게 정리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서 초기 팀을 빌드하고 동시에 회사와 경영진을 설득할 프로토타입을 개발하며 이제부터 경영진, 우리들 스스로, 그리고 앞으로 참여할 새로운 스탭들께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을 설명할 자료를 만들곤 했는데 이걸 ‘비전 피티’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사실 이 때 우리는 아직 빌드 된지 얼마 안 된 팀이고 또 아직 팀 빌드가 온전히 마무리 되지도 않아 일정의 상당 부분은 이력서 검토와 인터뷰, 그리고 네트워크를 동원해 적당한 인력을 구인하는데 보내고 있는 마당이어서 우리들이 함께 일할 때 어느 정도 퍼포먼스가 나올 지 잘 모르는 상황입니다. 종종 프로젝트 시작부터 마일스톤 목표를 정해 이를 달성하려는 시도를 할 때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시도를 말리는 입장입니다.

아직 처음 모인 우리들이 낼 수 있는 퍼포먼스가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목표를 설정하면 자칫 ‘실패하는 연습’을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목표를 좀 물렁하게 설정하고 우리들이 서로 정도로 일할 수 있는지 측정하기 위한 마일스톤을 수립할 것을 요청하곤 합니다. 실은 다들 이 바닥에서 한동안 구른 사람들이어서 퍼포먼스를 예측할 수 없지는 않지만 항상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일어나 이 사건을 마무리하는데 팀의 자원을 꽤 집중해야 하기도 해서 처음에 함부로 단단한 목표를 수립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또한 게임 프로젝트 자체가 요구사항이 모호한 상태에서 개발을 시작해 개발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요구사항이 서서히 명확해지지만 동시에 이전에 개발한 여러 기능이 서로 통합되면서 일어나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정을 예측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초반에는 더더욱 함부로 단단한 마일스톤 목표를 설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전 피티’ 문서 이야기로 돌아가 이 문서 뒷부분에는 항상 ‘로드맵’이 포함되었는데 우리가 대략 언제까지 어떤 목표를 달성한 끝에 대략 언제 시장에 런칭할 것이며 그 이후 대략적인 계획을 언급한 페이지입니다. 이런 페이지가 있다는 것은 방금 설명한 프로젝트 초반에 함부로 단단한 마일스톤 목표를 수립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와 완전히 반대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도 프로젝트 초반에 단단한 마일스톤을 수립하지 않으려는 자세와 비전 피티에 날짜가 선명히 찍혀 있는로드맵을 언급해야만 하는 행동이 서로 일관되지 않음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몸을 사리면 종종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을 사건 사고를 회피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돈을 내는 입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사에 고용되어 수행하는 일은 회사 입장에서는 은행에 돈을 넣어 두고 이자를 기대하거나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한 다음 기간에 따른 수익을 기대하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투자 방법에 비해 훨씬 위험하고 실패할 경우 자칫 아무 것도 회수할 수 없을 수도 있는 이런 위험한 일에 돈을 내는 이유는 만약 우리가 성공할 경우 더 안전한 투자 방법에 비해 훨씬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투자를 하려면 대략 어느 정도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금액이 투입되어야 하는지 프로젝트 초반부터 계획을 알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개발하는 입장에서는 초반에 일정이나 목표를 조심스럽게 수립한다 할 지라도 경영진, 회사, 투자자들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반에 이 프로젝트에 관련된 모두에게 우리가 할 일을 설명할 이 문서에는 아직 장담하기는 쉽지 않지만 로드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트위터를 통해 공개된 로드맵은 팀의 핵심 멤버들이 채용된 다음에 작성되었기는 하지만 팀의 퍼포먼스와 우리가 개발할 소프트웨어의 기술적인 도전 과제를 완벽히 이해한 상태에서 작성한 것은 아닐 겁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위험 요소와 도전 과제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프로젝트 초기가 아니라 이미 제품을 상당히 많이 만든 상태일 겁니다.

사실 2022년에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아 한동안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침 우리가 제품을 출시할 시장에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고 우리가 개발하는 소프트웨어의 장르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이 줄을 이었으며 이는 이 글을 작성하는 2023년 늦은 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한 해를 보낸 다음 우리는 드디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차이를 좁혀내는데 성공했고 우리가 계획을 달성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던 이전에 비해 훨씬 더 확신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적어도 지금까지는 처음에 제시한 올해의 로드맵을 지켜 내는 중입니다.

올해, 내년, 그리고 내후년의 로드맵을 지켜보며 올해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며 로드맵에 맞춰 개발을 진행해 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후 로드맵을 보며 인터넷에서 본 한스 짐머 같은 표정을 하고 한스 짐머가 한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운 좋게도 올해에는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일의 기술적인 도전의 일부를 무사히 수행해 냈지만 이 다음에 닥쳐 올 계획에 필요한 기술적인 도전, 게임디자인 상의 도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아직 확실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하지만 모여 있는 사람들의 역량으로 미루어 쉽지는 않겠지만 어떻게 만들다 보면 목표에 근접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문득 그렇게 먼 미래를 생각하며 걱정부터 시작하는 건 정신 건강에 그리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개발한 빌드로 미루어 올 연말 즈음에 빌드를 통해 할 수 있을 경험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고 이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경영진에게, 그리고 우리들을 신뢰한 투자자들에게 설명할 수 있으며 우리들이 잘 하면 연말 목표까지는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의 먼 목표까지 생각해 걱정하며 밤마다 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또 전혀 잠들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는 대신 어떻게든 돌아가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올 연말의 빌드 모습을 상상하고 그에 필요한 개발 항목들을 생각하다가 잠드는 것이 지금 건강을 지키며 할 수 있는 걱정의 최선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론. 이번에도 개발팀의 의지와 적은 관련만 있는 상태로 로드맵이 작성되어 외부에 공개되었고 처음에는 이 로드맵을 도대체 어떻게 완수해야 할 지 앞이 캄캄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미 우리들은 로드맵 일부를 완수해 나가고 있고 먼 미래를 예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가까운 미래까지는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