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석을 깔면 재미가 없어진다.
앞서 설명 드린 대로 보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보고에는 우리가 이 장르를 똑바로 개발할 능력이 있고 실제로 단기간 안에 전체의 작은 샘플을 똑바로 만들어냈으며 이 결과물이 프로덕션 단계로 진행할 만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음을 실제 사용 가능한 빌드를 통해 증명하려고 합니다.
처음 계획에는 빌드에 PvE 모드 한 가지만 포함하려고 했습니다. 제한 시간 안에 우리가 판매할 작정인 NFT가 게임 안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며 이 기능이 게임 측면으로, 그리고 블록체인 측면 모두에 확장성이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개발하기에는 PvE 모드 한 가지 만으로도 벅찰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PvE 모드를 준비하면서 PvP 모드를 함께 제공하는 편이 보고 대상을 설득하기에 더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주 큰 비용을 들이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적당한 PvP 플레이를 생각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보고에는 PvE 모드와 PvP 모드를 각각 한 가지 씩 선보이기로 합니다.
개발 중인 상황에서는 PvP와 PvE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게임 모드에 관계 없이 플레이어는 총으로 맞춘 그 누구나 죽을 수 있었는데 총에 맞은 상대가 몬스터이거나 플레이어이거나에 관계 없이 대미지를 입었고 체력이 0이 되면 죽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무래도 PvE 모드에서 프랜들리 파이어가 가능하면 시연에 문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를 막기 전까지는 실제 전쟁에서와 같이 같은 편이라도 포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 이상 누구나 순식간에 바닥에 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게임 모드를 테스트 하며 예상 가능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상황을 체험할 때마다 사람들의 본성에는 꽤 웃긴 측면이 있음을 느끼게 하는 상황이 이번에도 일어났습니다. PvE 모드를 테스트하며 아직 프랜들리 파이어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을 때 원활한 테스트를 위해 웬만하면 사람을 쏘지 말라는 규칙을 지켜 가며 테스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몬스터들이 아직 위협적일 때는 서로 힘을 모아 몬스터를 상대했지만 몬스터 측이 서서히 약해지며 플레이어들이 승기를 잡을 무렵이 되면 슬금슬금 서로를 노려 가며 협력이 깨져 자멸합니다. 이 플레이 패턴은 한참 바쁘게 일하며 숨 돌릴 틈을 찾기 어려워 하는 개발팀에게 잠시 서로 웃으며 플레이 하는 경험을 만들어 주곤 해서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반복해 보면 사람들마다 일관된 성향이 나타나는데 누군가는 아주 오래된 영화에서처럼 한 놈만 패거나 아직 몬스터들이 강력한 상황에서도 몰래 우리 편을 조금씩 공격해 결국 몬스터에게 쉽게 죽게 만들기를 즐기거나 마지막 몬스터가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자제력을 유지하다가 갑자기 돌변해 주변의 모두에게 총을 난사하기 시작하는 타입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이번 테스트에서도 마지막 보스가 쓰려지는 그 순간 지금까지는 서로 협력해 몬스터를 향하던 총구가 서로를 향해 돌아가고 그런 캐릭터를 플레이 하던 사람들이 마우스를 손에 쥔 채 서로를 둘러보며 피식 웃음을 퍼뜨리며 왼쪽 버튼을 클릭하기 시작할 때 누군가 ‘아니 이럴 거면 PvP에서 맞짱 뜨는 편이 낫지 않음? 왜 PvE에서 이러는 거임?’ 이라고 물었습니다. 이 상황을 한국적으로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멍석을 깔아 주면 그 직전까지는 즐겁게 하던 일을 결코 계속해서 즐겁게 하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 된 MMO 게임에는 여러 클래스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게임을 처음 시작한 모두에 해당하는 ‘노비스’라는 클래스였습니다. 이 클래스는 별다른 스킬이 없었고 경험치를 쌓아 다른 클래스로 바꾸면서 새로운 스킬을 얻고 각기 독특한 전투 스타일을 갖추게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 다른 클래스로 바꾸지 않고 게임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노비스 클래스를 유지하며 여러 던전에 나타난 끝에 게임 내 전설에 등극합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MMO 게임 전성기에 일어날 수 있을 법 한 진정한 롤 플레이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 제작사는 이런 플레이 스타일을 새로운 클래스로 정의해버리는데 이때부터 전설적인 클래스 아닌 클래스는 실제로 게임 상에 존재하는 클래스가 되어 버렸고 전설 단계에서의 신비로움은 사라지고 개발사에서 인정한 한 가지 성장 루트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플레이어들이 자생적으로 만들어낸 플레이를 개발사가 받아들여 일종의 멍석을 깔아 주는 행동이 항상 성공적일 수는 없으며 자생적인 플레이는 자생적인 상태로 그냥 둘 때 그 플레이가 더 잘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PvP 모드가 준비되어 상대 플레이어를 향해 총을 겨누는 행동이 그리 특별하지 않으며 그런 행동을 요구하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PvE에서 테스트가 끝날 무렵 더 자주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고 PvP는 여전히 정해진 플레이 시간이 아니면 항상 파리가 날렸습니다.
이런 현상은 실제 플레이어나 개발팀 구성원에 관계 없이 게임디자이너가 직접 의도하지 않은 플레이에 더 매력을 느끼며 예상하지 못한 상황의 전개, 그리고 규칙을 깨는 플레이에 더 매력을 느끼며 이와 똑같은 행동을 게임디자이너가 의도한 일종의 멍석을 깔아 놓은 환경에서 요구하면 행동을 하기야 하겠지만 이전만큼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특징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플레이어들의 심리를 고려하지 않으면 실컷 개발한 컨텐츠가 멍석으로 전락해 왜 현대 게임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재화를 사용하나요?에서 설명한 ‘보상에 의한 동작’으로만 컨텐츠가 동작하는 우울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