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획에는 단단한 컨셉이 필요해요
흔히 시스템기획자로 분류되는 사람에게 규모가 큰 일 덩어리를 맡기면 종종 일어나는 일 중에는 이 일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로부터 쉴 새 없이 흔들린 나머지 일이 진행되기도 전에 지쳐 버리는 것입니다. 일의 덩어리가 클수록 일에 관련된 사람들도 많고 이 사람들 각각은 모두들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게임은 개발에 참여하는 사람들 각각이 서로 다른 게임의 고객인 경우가 많아 의견의 종류는 더더욱 많아집니다. 모두들 더 잘 됐으면 하는 생각으로 한 마디 씩 거들지만 이들을 모두 듣고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기획자 입장은 하루하루 곤란해집니다. 운이 좋다면 의욕적으로 피드백을 준 누군가는 자신의 말 자체를 잊어버리지만 그렇지 않은 누군가는 왜 자기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는지 이후 이 일에 관련된 모든 공적인 자리에서 기획자를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세션 단위로 플레이 하는 가상의 PvP TPS 게임을 만든다고 해 보겠습니다. 팀을 꾸려 핵심 플레이를 만들고 대강 이어붙인 위젯을 통해 이제 게임이 돌아갑니다. 세션도 만들 수 있고 게임도 되고 승패 판정도 됩니다. 테스트해보니 생각보다 재미있는데다가 발전시킬 요소도 많아 보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대강 만든 UI 위젯 뭉치만으로는 서비스할 수 없으니 본격적으로 게임 바깥을 만들어야 합니다. UI로만 세션을 생성하는 것은 어째 좀 심심하니 인게임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근미래에 상점에서 판매할 꾸미기 아이템을 더 자주 노출하기 위한 로비 레벨과 여기 어울리는 UI를 개발하기로 합니다. 에픽 이름은 로비 개발이라고 해보겠습니다.
이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로비 배경의 레벨도 디자인해야 하고 그 위에 UI도 설계해야 합니다. 이들이 잘 합쳐져 아름답게 동작하려면 연출에도 신경 써야 하고 세션 생성, 플레이어 검색 등 지금까지는 없었던 다양한 기능을 추가로 제공해야 할 겁니다. 익숙한 시스템기획자는 비슷한 게임들을 살펴본 다음 인터페이스 와이어프레임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지나가며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합니다. 내가 본 다른 게임에서는 이렇게 답답한 인터페이스를 사용하지 않더라, 지금 내가 플레이하는 이 게임을 봐라. 나는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등등의 이야기를 거들기 시작합니다. 또 누군가는 UI 와이어프레임 위에 대강 올려놓은 버튼을 보며 이 버튼은 전체 UI의 밸런스를 깨니 이 아래쪽으로 옮겨야 한다거나 세션 목록의 플레이어 포트레이트는 너무 구식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잖아도 신경 쓸 부분이 많고 협업해야 할 사람들도 많은데 모든 사람이 지나가며 각자의 의견을 말하는 통에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목록에 적어 놓고 하나씩 반영도 해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행해집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일을 시작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을 둘러보면 온갖 개발팀에 유능한 디렉터가 마일스톤을 시작할 때 마일스톤에 필요한 각 기능의 하이컨셉을 충분히 설명하고 시작할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만 그게 가능한 스탭은 업계 전체를 통틀어도 드뭅니다. 대부분은 기능 이름만 있고 나머지는 그냥 알아서 해야 합니다. 때문에 업무의 기능 명세 기준으로 접근하기 쉬운데 기능의 나열과 이에 기반한 UI 와이어프레임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생각 없이 건넨 한마디 한마디에 쉽게 망가지기 마련입니다.
규모가 큰 기능 이름만으로 업무를 시작했다면 기능 명세가 머릿속에 떠오르더라도 잠깐 멈춰 이 기능을 지탱할 단단한 컨셉을 생각해내야 합니다. 다시 가상의 게임에 필요한 로비를 만드는 시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로비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여러 사람들이 레벨에 보여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싶기도 하고 또 세션 목록을 표시하는 인터페이스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어디에 모여있을까요. 싸우기 위한 사람들이니 임무를 수행 중인 군 병력이 나오는 영화나 사진을 찾아보며 적당한 분위기를 찾아냅니다. 마침 우리 전투 레벨 중에 시가전 레벨이 있는데 이 레벨의 무너진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이 안에 사람들이 모여있다면 가운데 분수를 둘러싸고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천막 안에 물건을 가지러 가거나 드럼통 주변에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 구석에 게시판이 있는데 거기 같이 출발할 사람을 모집하는 쪽지들이 붙어있을 것 같네요. 자.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됐습니다.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 겁니다. 누군가 와서 UI의 작은 버튼 이야기를 하거나 어제 밤에 플레이 한 게임 스크린샷을 보여주더라도 그 의견을 바로 피드백 목록에 추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뭘 만들 건지 전체 이미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아직 기획서는 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완성된 모습을 시각적인 표현을 사용해 설명해봅니다. 이전에는 내 생각을 지탱하는 컨셉이 없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피드백이었지만 이번에는 내 생각을 지탱하는 컨셉이 있어 사람들의 의견은 내 컨셉과 비교해 취하거나 버릴 수 있는 의견으로 바뀝니다. 그 망할놈의 몬헌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와서 집회소 이야기를 꺼내더라도 그걸 피드백 목록에 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기획을 기능 단위로 접근하려고 할 수록 이런 함정에 더 잘 빠지는 것 같습니다. 큰 팀에서 시스템 기획자 타이틀을 달고 일하기 시작하면 뭐든지 기능 단위로 접근할 때 일하기 더 쉽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상태가 되는 것도 같고요. 하지만 기능의 크기가 클수록 컨셉은 중요합니다. 내 의견 전체를 단단히 지탱하는 컨셉을 만들고 이를 근거로 의견에 대응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