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플레이 경험과 MMO의 가치
팀에서 제가 하는 일 중에는 요구사항을 듣고 이 요구사항이 현재 구축된 시스템이 어디까지 소화할 수 있고 어떤 기능을 추가 개발하면 요구사항을 온전히 소화할 수 있는지, 또 이 요구사항이 게임에 들어가면 어떤 파급효과가 있을지를 예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글을 읽다 보니 영상 분야의 VFX 수퍼바이저와 비슷한 롤인 것 같기도 합니다. 다만 저는 특수효과 대신 게임 시스템에 대해 비슷한 일을 하는 느낌입니다. 또 여기에는 요구사항과 시스템 이외에도 개발 중인 장르에서 당연히 가능한 일과 가능하게 만드는데 큰 비용을 소모할 일을 구분하는 일도 있습니다. 기능이 요구사항으로만 존재할 때는 멋져 보이지만 이를 실제로 게임에 도입하기 위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한동안 모바일 MMO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크게 두 가지 요구사항을 듣고 이를 게임에 어울리는 형태로 조정하도록 협상한 일이 기억에 남는데요, 하나는 모바일 게임 관점에서 자동진행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 다른 하나는 MMO 게임 관점에서 싱글플레이의 수준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자동진행은 언젠가 따로 이야기할만한 주제라고 생각해서 지금 이야기하지는 않을 거고요, 이번에는 싱글플레이 경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MMO 게임의 경험을 디자인할 때 싱글플레이 게임에서 주는 풍부한 경험을 주길 원한다면 우리 게임 장르가 MMO임을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들은 회사에서 MMO 게임을 만들고 있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MMO 장르에 충분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싱글플레이 게임을 더 좋아합니다. 또 누군가는 영화를 더 좋아하기도 하고요. 이들은 풍부한 싱글플레이 경험을 만들어내는데 도움이 됩니다. MMO 게임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시간이 흐르지 않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스토리를 통한 경험을 만들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깁니다. 플레이어의 현재 진행에 맞게 월드를 구성하고 싶지만 월드는 다른 플레이어와 공유하는 공간이므로 플레이어 한 명의 상황에 맞춰 재구성해주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만약 플레이어 한 명에게 월드를 맞춘다면 다른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이 상태는 어떻게 보여야 할지 주의깊게 정의하지 않으면 실컷 개발한 멋진 경험이 멀티플레이 환경에서 완전히 망가질 수 있습니다.
월드에서 플레이어의 진행에 맞게 쉽게 바꿀 수 있는 요소는 NPC나 몬스터의 배치가 있습니다. 나머지 플레이어들에게는 이 상황이 보이지 않지만 현재 플레이어에게는 특정 장소에 NPC가 스토리에 맞게 서 있어 다가가 대화하거나 플레이어에게만 보이는 몬스터가 있어 이들을 퇴치하는 스토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현재 플레이어를 고려한 싱글플레이만을 생각하면 이는 아무 문제 없는 요구사항입니다만 월드를 다른 모든 플레이어와 공유하는 상황에서는 곤란한 상황들이 생깁니다. 일단 나한테 보이는 NPC와 나한테 보이는 몬스터와 상호작용 할 때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나는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 또 내 파티원들에게 내 플레이는 어떻게 공유되어야 하는가, 나에게만 보이는 몬스터로부터 드랍된 보상은 월드에서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등입니다.
이런 문제를 비교적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플레이어 한 명을 위해 바꿔야 하는 월드의 상태를 인스턴스로 만들어 그 안에서만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경우에 따라 로딩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로딩이 없는 방식을 ‘위상변화’라고도 부르는 것 같은데요, 이 경우에도 월드를 현재 플레이어에 맞춰 구성할 수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위에 이야기한 문제들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인스턴스에 진입한 플레이어는 월드의 나머지 플레이어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 인스턴스의 진입과 진출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 같은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이들을 주의깊게 정의하지 않으면 현재 플레이어는 물론 나머지 플레이어들의 몰입감을 완전히 깨버릴 수 있습니다.
인스턴스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널리 알려진 방법이지만 메인퀘스트에 의한 성장구간에서 이런 장치를 너무 많이 사용하면 플레이어들 상당수가 꽤 긴 시간동안 인스턴스 안에서 플레이하고 있어 월드의 나머지 부분에 잘 나타나지 않게 되는 문제도 생깁니다. 이건 MMO 장르에서 좀 더 근본적인 문제인데 게임의 장르가 MMO임에도 불구하고 월드에 다른 사람들이 드물게 보이는 겁니다. MMO 장르로부터 고객이 얻기를 원하는 경험 중에는 이 월드에 다른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 부대끼고 있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인스턴스를 통한 싱글플레이 경험을 중시할수록 인스턴스 바깥의 플레이어들이 서로 마주칠 일이 줄어듭니다. 이건 MMO 게임의 근본적인 경험을 망가뜨립니다.
그래도 여러 MMO 프로젝트에 걸쳐 여전히 이런 요구를 받습니다. 이 장면은 스토리 상 굉장히 중요하니 인스턴스를 만들어 개인적인 경험을 하도록 만들고 싶다고요. 이런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위에 이야기한 인스턴스, 위상변화, 이들을 사용할 때 월드와 상호작용 규칙 등을 설계하곤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MMO 게임에서 이런 경험이 고객들에게 MMO가 줄 수 있는 가치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 MMO 장르의 장점과 특징을 희석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