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과 스토리는 게임 안에 있어야 함

순전히, 오직 개인적으로는 설정과 스토리에 신경 쓴 게임이라는 말을 그리 존중하지 않습니다. 더 어릴 때는 그 분도 분명 어린 패기에 말했을 것 같은 포르노에 스토리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게임에도 그렇다고 했던 말을 좋아했고 이 말을 인용할 수 있는 모든 상황마다 인용하곤 했습니다.

한편 그 말을 했던 분도 하프라이프 시리즈의 성공 이후 이 발언을 취소했는데 게임은 게임에서 한 경험을 통해 기억에 남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게임을 플레이 하며 내가 체험한 스토리에 의해서 기억되기도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분의 발언 취소와 사과 이후에도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종종 게임이 게임으로써 줄 수 있는 경험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설정과 스토리를 걸고 넘어지는 모습을 종종 보며 이 말들에 좋은 감정을 고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게임은 맨 처음에 일상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경험 자체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적을 피해 별을 먹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비행기를 조종하고 탱크를 조정하거나 이족 보행 로봇을 조종하는 등 경험 자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하지만 분명 경험 만으로는 게임 속 상황에 의미를 부여해 고객에게 내재적 동기를 부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눈 앞의 적군 비행기에 미사일을 쏴 격추 하는 경험 자체는 분명 문제 없어 보이지만 만약 여기에 눈 앞의 적군 비행기는 알고 보니 아군의 어떤 부조리에 불만을 가지고 배신하려고 하는 친한 동료가 타고 있다면 어떨까요. 분명 똑같이 격추 하겠지만 격추 하는 자신의 선택과 이 선택을 포함한 경험 전체는 훨씬 더 깊이 남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며 게임은 경험 뿐 아니라 그 경험을 해야 하는 이유를 고객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위해 게임에는 본격적으로 설정과 스토리가 필요해 집니다. 한동안은 모두가 게임에 설정과 스토리를 어떻게 풀어 내야 할 지 잘 몰랐기 때문에 게임을 구입하면 상자 안에 두꺼운 설정집을 넣어 파는 시도를 하기도 하고 CD 여러 장에 걸쳐 실제 배우를 동원해 촬영한 시네마틱을 사용한 게임도 나타났습니다. 십 수년에 걸쳐 여러 가지 시도 끝에 현대에는 고객이 게임 속 세계를 인정하게 만드는 설정과 이에 기반한 스토리, 그리고 스토리를 따라가면서도 고객이 세계 곳곳을 비교적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수준으로 발전해 온 것 같아 보입니다. 미래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설정을 통해 고객을 납득 시키고 커다란 목표는 있지만 그 목표를 직접적으로 강제하지는 않으며 고객이 납득한 세계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게 만들고 이 체험을 작은 스토리들로 떠받치는 형태는 한동안 유지될 것 같아 보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하려고 게임 스토리를 낮게 평가했던 것으로 유명한 분의 이야기를 끌고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살짝 이야기한 종종 탄탄한 설정과 방대한 스토리가 게임 자체의 부족한 경험을 감추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모습을 볼 때 불편한 마음에 게임의 스토리에 나쁜 평가를 하는 말을 했던 그 분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대충 생각해 봐도 게임에 탄탄한 설정과 방대한 스토리가 있어 나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게임 스스로가 이런 설정과 스토리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경험을 전달하지 못하는 수준이라면 설정이나 스토리는 그냥 게임을 샀더니 따라오는 두툼한 종이 책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장에는 오직 비슷한 게임만 있고 게임들 사이에 차별점을 만들기 위해 종종 게임이 줄 수 있는 경험 자체보다는 게임과 아주 느슨한 관계를 가진 설정과 스토리를 만들어 게임과 별도로 배포하며 게임의 부족한 차별점을 보충하곤 하는 경우가 있고 썩 만족스럽지 않으며 과거에 게임의 스토리를 낮게 평가하던 그 분을 계속해서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뻔한 소리지만 게임의 설정과 스토리가 의미 있으려면 설정과 스토리가 게임이 줄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설명되어야 합니다. 고객은 게임 자체만으로 게임 세계를 인정하고 일단 게임 세계를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경험을 통해 스토리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게임과 동떨어진 두꺼운 종이 책이나 오직 웹사이트에만 있는 기나긴 텍스트가 아니라 게임 자체를 통해 이들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게임에 스토리는 나쁜 평가를 받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