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크라이5: 제이콥 시드는 모니터 밖의 나를 세뇌시켰다
지난 두어 주 동안 파크라이5를 플레이했습니다. 파크라이 시리즈 자체를 처음 해보는 거였는데 처음 시작할때와 끝날 때 느낌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시작할 때는 뭔가 게임이 투박하고 덜 만들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느낌은 뭔가 덜 만들어진 것 같았고 인터페이스는 이대로 출시돼도 괜찮았을까 싶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꾹 참고 플레이를 계속하며 게임에 약간 적응하자 생각보다 훨씬 잘 만들어진 레벨디자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후반에 접어들자 스토리가 기묘하다는 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게임이 모니터 바깥의 나를 세뇌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스포일러 경고: 파크라이5는 이제 나온지 꽤 된 게임이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큰 부담이 적기는 하지만 미래에 파크라이5를 플레이하실 계획이 있다면 이 다음을 읽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 게임이 나에게 스토리를 설명하는 방식은 상당히 폭력적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총질을 하거나 상대가 나에게 총질을 하는 그런 류의 폭력성이 아니라 나를 납치해 플레이를 가로막고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든 채로 스토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존 시드 지역에서 처음으로 납치당할 때 경험은 불쾌했습니다. 사방에서 납치단이 들이닥쳤는데 그걸 막아내야 하는 줄 알고 온갖 노력을 해서 막으려고 했습니다. 근데 아무리 해도 그 시점에 내 무기로는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가 없었고 뭐 이딴 게임이 있나 싶어 전투를 하다 말고 게임을 멈추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납치되고 나서야 내게 들이닥친 납치단은 그걸 전투로 이겨내라는게 아니라는걸 알게 됐습니다. 이 과정은 폭력적이고 또 좌절스러웠습니다. 그 전까지 게임은 광신도들을 화력으로 찍어누르든지 뒤에서 접근해 목을 꺾어 스토리를 진행하라고 나에게 가르쳐 주고 있었는데 그 규칙을 한방에 무너뜨려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첫 납치에서 이 게임의 폭력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을 이해하고 나자 그 다음부터는 처음처럼 고통스럽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납치 시퀀스가 시작되면 손을 떼고 ‘그래 데려가라 데려가’ 하고 마음 편히 납치 상황을 대하게 됐습니다.
제이콥 시드 지역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스토리텔링을 하는데 이번에는 처음보다는 부드러운 방식으로 납치하기 시작합니다. 존 시드는 내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화력을 쏟아부어 납치했다면 제이콥 시드는 처음 한 번 나에게 납치되는 신호를 가르쳐줍니다. 이 노래가 나오면 너는 저항하지 못하고 납치될 거라고요. 이 첫 학습을 거친 다음에는 납치단이 나타나 나를 화력으로 밀어버리는 것도 아닌데 일단 노래가 나오기 시작하면 손을 떼고 로딩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납치 시퀀스는 이제 노래가 나오는 동안 눈앞의 적들을 이유 없이 쏴야 했는데 처음엔 약간 짜증이 났습니다. 아무거나 내키는 대로 먼저 플레이해도 상관없는 오픈월드 게임에서 순식간에 조의를 표하지 않으면 아무 진행도 할 수 없는 콜오브듀티 같은 양상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퀀스를 플레이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진행할 수 없으니 짜증은 났지만 이 시퀀스를 반복해서 플레이했습니다. 반복할 때마다 노래가 시작되고 화면이 적색으로 물들면 이전과 똑같이 테이블 위의 총을 집어 이전과 똑같은 자리에 있는 적들을 이유도 없이 쏘기를 반복했습니다.
시퀀스는 조금씩 길어지고 납치의 환각에서 깨어날 때 주변에 죽어 있는 민간인들을 보며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내 의지와 달리 누군가를 죽이게 될 거라고요. 그리고 이 시점은 금새 다가왔습니다. 바로 이전에 경험한 납치 시퀀스의 스테이지에 ‘딱 한 모퉁이’가 더 추가되어 있을 뿐이었는데 모퉁이를 돌자마자 화면을 채운 적색이 사라졌지만 습관적으로 눈앞의 사람에게 총을 쐈고 그 순간 게임이 멈췄습니다. 이게 내가 예상한 바로 그 장면이었습니다. 게임 속에서 세뇌된 나는 쏴서는 안 될 사람을 쏜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물론 상대를 쏘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지만 새로 추가된 모퉁이를 돌자마자 아무 의심도 없이 ‘빨리 시퀀스를 끝내기 위해’ 일단 총부터 쏘게 만들었습니다.
이 뒤에 좀 더 플레이해 제이콥 시드 지역을 탈환하고 나서 게임을 멈추고 잠깐 생각해봤습니다. 게임 속의 나는 제이콥 시드에 의해 세뇌당해 노래를 들으면 같은 행동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행동을 하는 것은 모니터 앞에 앉은 나였습니다. 처음에는 제한시간 때문에 앞으로 진행해 나갔지만 나중에는 이 시퀀스를 빨리 끝내고 다음 플레이를 하고싶어서 점점 생각하기보다는 총을 먼저 쏘게 됐고 그러는 사이에 스테이지는 아주 조금씩 길어져 이전에 쏜 적 없는 사람들을 쏘게 됐습니다. 이 변화를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금새 스토리상 쏴서는 안 될 사람을 그렇게 쉽게 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게임은 게임 속의 나를 세뇌시켰지만 이 장치는 모니터 바깥에 있는 나 역시 세뇌시켰습니다. 기묘한 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