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 행동 재확인
굳이 게임 뿐만이 아니라 컴퓨터를 사용하다 보면 중요한 결정을 내릴 일이 많습니다. 메일을 삭제할지 말지 결정하거나 물건값을 결제할지 말지 결정하는 일이 대표적입니다. 또 모두가 하는 거짓말로 ‘약관을 모두 읽었으며 동의합니다’ 버튼이나 체크박스를 누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행동은 이후 만드는 사람이나 사용하는 사람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귀찮지만 한번 더 묻곤 합니다.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라고요. 하지만 어떤 동작에 이렇게 다시 물어야 할 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앱들은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정말 그 행동을 할 지를 다시 묻기도 하고 그 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 게임을 하다가 ‘어??!!?!?’ 하고 외친다면 당연히 한번 더 확인을 할 거라고 예상한 어떤 행동이 확인 없이 바로 수행되어 버렸을 겁니다.
이런 재확인을 똑똑하게 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동작을 되돌릴 수 있게 하는 겁니다. 메일을 지울지 말 지 물어보는 대신에 일단 지운 다음 휴지통에서 다시 꺼낼 수 있게 하면 삭제 행동을 재확인 할 필요도 없고 사용자가 뭔가 잘못 되었음을 느낄 때 심박이 올라가지 않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게임에서는 상점에 ‘되사기’ 기능이 있습니다. 내 인벤토리에는 여러 아이템들이 있는데 이 중에는 상인에게 팔거나 분해해야 할 아이템부터 지금 당장은 장착할 수 없지만 2레벨 뒤에는 장착할 수 있게 될 전설 아이템이 섞여 있습니다. 상인에게 아이템을 팔 때 별 생각 없이 인벤토리에 장비 전체를 선택해서 팔아버리는 순간 전설 아이템을 팔아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겁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화면 어딘가에 상인의 인벤토리를 보여주고 일정 기간 동안 내가 팔았던 아이템을 보여줍니다. 실수로 팔면 안되는 아이템을 팔아버렸다면 상인으로부터 아이템을 되살 수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게임마다 여러 접근방법을 사용합니다. 내 인벤토리에서 팔아야 할 아이템을 선택할 때 아이템의 등급에 따라 일괄선택하는 기능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 일괄선택에는 의도적으로 전설 등급을 선택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일괄선택을 통해서는 전설 등급 아이템을 의도하지 않게 팔아버리는 실수를 하기 어렵습니다. 애초에 전설 등급은 상점에 팔 수 없기도 합니다. 고급이나 희귀 아이템은 상점에 팔거나 대장장이에게 분해하지만 전설은 아예 다른 NPC의 다른 기능을 통하게 합니다. 사실 이건 실수를 대비한 기능이라기보다는 전설 아이템이 플레이어캐릭터의 성장에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게 만들기 위한 장치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실수에 대비하는 기능으로도 잘 동작합니다.
최근에 경험한 ‘정수 추출’ 인터페이스를 살펴보면 파괴적 행동을 수행하기 전에 실수를 방어하는 메커닉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례에서 정수 추출은 사용하지 않을 전설 아이템을 없애는 행동입니다. 이미 정수 추출을 담당하는 NPC는 다른 기능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다른 행동과 헛갈릴 가능성이 낮지만 전설 아이템을 함부로 선택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정수를 추출할 아이템을 선택해야 하는데 이 때 내 인벤토리 전체를 보여주는 대신 전설 아이템만 필터링한 별도 리스트를 보여주고 이들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인터페이스에서는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추출’ 버튼을 클릭하면 팝업을 띄워 한번 더 확인합니다. 그 다음에야 전설 아이템을 파괴합니다.
이 사례에서 정수 추출 기능은 실수를 방지하도록 크게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정수 추출은 완전히 분리된 NPC가 수행합니다. 이미 기능이 많은 대장장이에 섞여 있지 않습니다. 둘째. 아이템을 선택할 때 표준 인벤토리가 아닌 전용 리스트를 보여줍니다. 표준 인벤토리를 보고 플레이어가 반사적으로 할 행동에 대항합니다. 셋째. 마지막 단계에서 전통적인 팝업을 띄워 한번 더 행동을 확인합니다. 그저 ‘정말 정수를 추출하시겠습니까?’ 한 단계로 실수에 대항하는 것 보다 훨씬 나은 접근이라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