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한 길찾기 궤적
종종 훌륭한 게임을 개발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온갖 사소한 점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쓴 까닭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플레이어 입장에서 바라보면 내가 플레이 하는 게임이 이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고양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하는 입장에서는 종종 핵심에 집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런 인터뷰를 플레이어가 보는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이런 인터뷰를 우리 팀장님 -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팀장님입니다 - 이 보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 팀장님이 게임의 핵심을 잘 요약하지 못하고 마일스톤 목표를 잘 제시하지 못하며 이번에 개발하는 컨텐트가 게임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나 핵심 플레이를 잘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이런 인터뷰는 이런 중요한 점들을 모두 제쳐놓고 ‘세세한' 항목에 매몰되어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들면서도 정작 핵심을 개발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만들 겁니다.
디아블로 이모탈을 플레이하면서 중국 게임으로부터 느꼈던 쿨함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 분야의 최고는 기적의 검인데 이 게임은 우리가 모바일 MMO 게임을 개발하며 자잘한데 신경쓴다는 미명하게 핵심이 아닌 기능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몇 달을 허비하기를 거부하고 오직 핵심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를 쿨하게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게임이 좀 조잡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플레이 할수록 오직 핵심에만 집중한 컨텐츠와 메커닉은 게임을 경쾌하게 만들고 게임의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는 바를 돌려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게임에 돈을 더 낼 지 말지 의사결정하기도 훨씬 편합니다. 이번 디아블로 이모탈에서는 문득 자동이동을 하다가 바닥에 그려진 발자국을 보고 이 쿨함을 떠올렸습니다.
이 발자국은 퀘스트에서 내가 이동할 목적지까지 궤적을 나타냅니다. 이는 자동이동을 할 때도 표시해 줍니다. 이 궤적은 현재 플레이어의 위치로부터 목적지까지 이동 경로를 계산해 뿌려주는데 기계가 계산한 이동 경로를 그대로 표시하면 기계적인 느낌도 나고 또 레벨 상에 그려진 길과 일치하지 않아 보기에 나쁘기 때문에 사람이 직접 레벨 상에 난 길에 따라 경로를 입력해 두면 이 경로 상에 궤적을 표시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심리스 방식이라면 목적지까지 경로를 계속해서 연결해서 표시하면 되고 존 방식이라면 목적지까지 이동하는데 거쳐야 할 모든 존을 구해 놓은 다음 이번 존에서 다음 존 출구까지만 경로를 표시합니다. 그 다음은 다음 존에 넘어가서 다시 계산하면 됩니다.
그런데 경로를 사람이 그려도 갈림길에서는 경로를 예쁘게 만들기 쉽지 않습니다. 레벨에 사거리가 있다면 두 경로가 한 점에서 교차하게 되는데 이 교차하는 모양 그대로 자동이동 궤적을 그리면 궤적 끝이 뾰족해집니다. 누군가는 이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해 당장 고쳐야 할 문제로 정의해버리곤 합니다. 교차하는 궤적을 예쁘게 만들기 위해서 두 경로가 한 점에서 교차하게 하는 대신 기차 선로가 휘어지는 것처럼 경로가 꺾이는 부분을 예쁘게 다듬은 제 2의 궤적을 또다시 사람이 예쁘게 그려줍니다. 만약 두 경로가 교차하는 사거리라면 모든 방향에서 나머지 방향으로 궤적이 길 모양에 맞춰 예쁘게 휘어지는 네 가지 추가 경로를 사람이 그려주고 계산한 자동이동 경로에 따라 이 추가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해 전체 경로를 예쁘게 그려줍니다.
하지만 디아블로 이모탈에서 오랜만에 만난 자동이동 궤적은 그런 문제를 쿨하게 씹었습니다. 경로가 튀어나온 부분이 가끔 눈에 띄지만 이와 관계 없이 플레이어 캐릭터는 어쨌든 자동이동을 통해 목적지에 도착하고 궤적을 따라 수동이동 할 때도 이 궤적을 따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 궤적을 예쁘게 다듬는데 몇 주를 낭비하는 대신 아직 확립되지 않은 핵심 플레이에 더 집중하고 하루라도 더 빨리 출시해서 고객들로부터 평가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세세한 부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개발 진행상황 상 우선순위를 높이 평가할 필요가 없는 일에 우선순위를 부여해 고생은 고생대로 했지만 발매일을 단 한 시간도 앞당길 수 없는 일을 하느니 디아블로 이모탈처럼 이런 문제를 쿨하게 넘어가 출시에 도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