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월드 게임 개발에 지레 겁먹음

파크라이 6을 플레이 하고 있습니다. 유비소프트에서는 여러 가지 오픈월드 프랜차이즈를 개발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자주 플레이 하게 되는 것들은 어쎄신 크리드, 파크라이, 고스트 리컨 시리즈입니다. 이 프랜차이즈 게임들을 플레이 해 보면 상당히 비슷한 게임디자인과 비슷한 기술에 기반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데 나쁘게 말하면 거의 비슷한 시스템에 껍데기를 바꾼 것 같은 느낌이지만 또 좋은 면을 생각해 보면 한 퍼블리셔에 속한 여러 스튜디오에서 서로 겉모양은 다르지만 비슷한 게임을 비슷한 완성도로 비슷한 기간마다 개발해낼 수 있다는 점은 정말 대단함.

우리들이 비슷한 MMO 게임을 서로 다른 팀, 서로 다른 회사에서 개발해 내기 위해 언리얼 엔진 하나만 덜렁 가지고 완전히 바닥부터 개발을 시작해 오랜 시간을 소모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직접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니드 포 스피드 시리즈의 신작이 시작되면 일단 이전 게임의 퍼포스 리파지토리를 통째로 받아 놓고 시작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정도 지원조차 없이 시작하는 우리들에 비해 유비소프트는 그들을 낮춰 부르는 표현인 공장식 오픈월드 게임 개발에는 경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파크라이 6은 여전히 오픈월드 게임인 나머지 게임 내 구성 요소가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켜 분명 개발자들이 의도하지 않았을 것 같은 플레이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파크라이 6의 배경인 섬에는 넓은 섬 전역에 걸쳐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고 이들은 플레이어가 섬에서 원활한 게릴라 활동을 하는데 방해 요소로 작용합니다. 자동차를 타고 검문소를 지나갈 때 병사들에게 발각되면 타이어가 터져 자동차로 이동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상하지 않은 시점에 전투를 벌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검문소를 발견할 때마다 파괴해 점령해야 하는데 섬 전역에 퍼져 있고 게임 초반의 화력으로는 후반 지역에 있는 검문소를 파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게임 초반부터 섬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지만 검문소를 파괴하는 등의 실제 플레이는 어려운 상태이고 또 이 검문소가 플레이어들이 게임디자이너들의 예상 순서를 너무 많이 어기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로써 동작합니다.

하지만 초반에 지나가는 탱크를 훔치면 이런 의도를 완전히 고장 낼 수 있는데 극 초반에 도로 위를 얼쩡거리다가 탱크가 지나갈 때 자동차로 길을 막고 탱크를 훔치면 게임 시점에 걸맞지 않은 상당한 화력을 한 방에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상태로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고 그냥 섬 전체를 천천히 돌며 검문소를 전부 파괴할 수 있는데 초반이라 시간이 좀 걸리고 또 탱크가 무적은 아니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게임에서 허락하는 방법으로 부서진 탱크를 천천히 수리해 가며 조금씩 전진하면 아주 까다로운 지형에 위치한 검문소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검문소를 시작하자마자 다 파괴해 놓고 게임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분명 검문소는 오픈월드 게임임을 감안해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더라도 플레이어가 게임 진행을 너무 망가뜨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제한적인 다양한 접근을 강제하는 장치였을 것 같은데 그냥 지나가는 탱크와 상호작용을 통해 이런 장치가 완전히 무력화 됩니다.

검문소와 비슷한 다른 한 가지 사례는 대공포를 없애는 미션인데 대공포 역시 섬 전역에 설치되어 있어 하늘을 나는 탈것을 얻더라도 이를 사용해 섬 전역에 한번에 접근해 플레이 순서를 너무 많이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나는 탈것은 한 번 얻으면 굉장히 편리하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지만 마냥 이를 자유롭게 풀어 두면 이론적으로 시작하자마자 최종 지역으로 직행해 시나리오 스크립트를 다 망가뜨리고 엔딩을 보거나 예상하지 못한 버그 상황에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섬 전역에는 강력한 대공포가 있어 함부로 하늘을 날아 게임디자이너가 원하지 않는 시점에 원하지 않는 장소까지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격 헬리콥터를 얻으면 이런 제한 역시 상당히 쉽게 없앨 수 있는데 게임적 허용으로 파크라이에서 높이 솟은 나무 꼭대기나 전선에는 충돌 처리가 없습니다. 만약 이런 물체 하나하나에 제대로 된 충돌 처리를 하면 헬리콥터를 운용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워집니다. 어디 좀 날아갈까 싶으면 순식간에 전선에 걸려 추락하고 또 숲 속 작은 공터에 착륙하다가 나뭇가지에 살짝 스쳐 추락하기를 반복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좀 편안하게 게임 하라는 배려로 어지간한 높이 솟은 물체에는 충돌 처리가 없어서 실제 세계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수준의 저공 비행이 가능한데 이게 문제입니다.

공격 헬리콥터를 실제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저공으로 천천히 몰아 대공포 진지에 접근하면 대공포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고 이런 느긋한 플레이를 납득할 수만 있다면 천천히 대공포대를 방어하는 군대의 공격을 멀직히 돌아 대공포에 접근한 다음 로켓을 발사해 대공포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검문소를 파괴할 때와 같은 요령으로 섬 전역을 느긋하게 저공 비행하며 총에 좀 맞으면 어디 구석에 세워 놓고 수리하기를 반복하며 섬 전역에 거의 대부분의 대공포를 파괴해 놓고 플레이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꼼수라고 하기도 뭣할 정도로 그냥 잠깐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플레이 방법이기도 하고 또 이런 간단한 방법 때문에 게임 전체의 이동 제어 수단이 순식간에 무력화되는 것이 웃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잖아도 게임 소프트웨어를 설계하고 개발하는 과정에서 여러 구성 요소가 서로 상호작용 하며 일어나는 온갖 비용을 예상하지 못해 비용이 끝없이 늘어나는 개발 과정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게임 자체가 오픈월드에서 일단 멀쩡히 동작하는 게임 내 구성 요소들이 상호작용 하며 예상하지 못했을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며 오픈월드 게임을 개발하는 건 정말 만만찮은 일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MMO 게임을 여러 번 만들어 보면서 아주 다양하거나 아주 복잡하지는 않은 시스템과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는 사례를 봐 와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예상하는데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기에 오픈월드가 더해지면서 그 안에서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나 게임디자이너의 의도를 망가뜨릴지 이미 몹시 걱정스럽습니다. 야라 섬의 방공망과 검문소 대부분을 파괴하며 한편으로는 즐거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게 남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유비소프트는 이런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만들어 내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