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읽기 회고
지난 6월에 2022년 상반기에 읽은 책 리뷰를 했습니다. 하반기에는 사정 상 상반기만큼 이것 저것 읽지 못한 것 같은데 일단 읽은 책 기록은 남겨 뒀으니 상반기에 읽은 책은 생략하고 하반기에 읽은 책만 짤막하게 하나 씩 이야기해 볼 작정입니다.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
제목을 보고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의욕이 없고 집중력이 부족하고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들, 이 아이들이 공교육으로부터 낙오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또 아이들이 범죄를 저질러 소년원에 수용되는 이유는 무엇일지를 생각해봤습니다. 한편으로는 의욕이 없고 집중력이 부족하고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건 내 스스로의 상태와 별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이유일지 궁금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인지 기능이 충분하지 않으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왜곡해서 받아들여 이 이후의 모든 판단과 행동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또 인지 기능에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는 지적 장애로 구분되지 않는 경계성 지능인 아이들이 이 상태에 알맞은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합니다. 항상 자원이 부족한 공교육 시스템이 이들에게 맞는 지원을 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쉽게 낙오되고 또 쉽게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현대에는 ADHD 같은 상태가 꽤 널리 알려져 그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는 여러 문제가 있을 테고 어릴 때 겪었던 여러 가지 문제 덕분에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드라마 한니발에서 시계를 그리는 테스트가 나오는데 비슷하게 여러 도형이 조합된 모양을 따라 그리는 시험 사례가 나오는데 한 아이가 이를 따라 그린 결과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읽다 말고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타임라인에서 가끔 뵙는 약간 다른 방법으로 이동하시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밖에서 다른 방법으로 이동하시는 분들을 볼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 주변 사람들이 내 나쁜 시력을 이해하지 못하곤 했습니다. 가령 맨 앞자리에 앉아도 칠판에 글자를 잘 읽을 수 없었는데 눈이 나쁘다고 해서 맨 앞에 앉혀줬는데 왜 아무 효과가 없는지 납득할 수 없어 하던 교사들이 있었고요. 비슷하게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하고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또 항상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 비슷한 모양을 하고 살아가다 보면 내 스스로도 나와 비슷한 사람, 또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아예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작가님의 지하철 눈싸움 이야기를 읽으며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하이 아웃풋 매니지먼트
이전에 이야기한 최저 가치 단계의 모니터링은 이 책을 읽고 한 생각입니다. 왜 우리들의 이전 게임 개발 경험이 그토록 고통스러웠는지 생각해보게 된 기회가 되었습니다. 게임 개발에서 더 이른 시점에 피드백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어쩌면 의사결정자들의 상상력이 부족해서일 수 있습니다. 문서와 프로토타입과 설명만으로는 이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비용을 점점 더 많이 들여 가는 과정이 계속되는 동안 비용이 너무 높아지지 않는 시점에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우리들의 개발은 덜 고통스러워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분은 수 십 년이 흐른 미래 사람이 보기에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끝 부분처럼 주변을 둘러싼 세계를 너무 순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만들지만 여전히 경험과 생각 대부분에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파과, 힐 하우스의 유령, 레슨 인 캐미스트리
이 세 권은 추석 전 연휴를 위한 술술 읽히는 소설 추천에 나온 책입니다. 나열한 순서대로 읽었는데 사정 상 세 가지 소설을 모두 읽은 건 추석이 지나고 한참 추워질 무렵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파과는 취향과 약간 어긋났습니다. 느와르 형식 때문인지 아니면 약간은 장황한 묘사 때문일지 아니면 한껏 멋 낸 다음 ‘사실은 이랬어’ 하고 약간 나를 뒤에 놓고 혼자 가 버리는, 마치 만화 김전일 시리즈에서 느끼던 느낌 때문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힐 하우스의 유령은 이런 무서운 집에 관한 이야기의 원조 격이라고 해서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완전 맘에 들었습니다. 주로 넬리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니 당연히 본인의 눈으로 보는 주변과 스스로의 생각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지만 처음에는 왜 이렇게 개인적인 인식과 심리에 주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건을 거듭할 수록 처음에 넬리의 생각을 따라 가며 만들어 놓은 내 마음 속에 넬리의 세계가 조금씩 어긋나면서 ‘어?’ 싶은 부분들이 나타났고 절정 부분에 가선 역시 이럴 수밖에 없었겠다고 넬리의 행동에 완전히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절정이 지나고 결말의 결정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한편으로는 제대로 넬리의 마음을 따라갔다면 이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넬리는 이제 이 세계에서 힐 하우스를 빼고는 속하는 곳이 없었으니까요.
레슨 인 캐미스트리는 이 책을 위한 글 한 편을 써야 할 책이었지만 책을 너무 늦게 읽어 시기를 놓쳤습니다. 6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카르멘처럼 당시 시대상을 표현하기에는 부담이 있어 훨씬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야기는 엘리자베스 조트가 화학자이자 인기 프로그램의 진행자로써 그 시대를 살아 가며 겪는 여러 가지 일에 따라 결말에 이릅니다. 범죄와 사랑과 무시와 차별과 고통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유쾌함을 잃지 않아 마음을 졸였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했습니다. 이야기는 마음 편하게 마무리되지만 한편으로는 번역가님의 글처럼 이런 이야기가 실제 세계에 일어날 수 있을까. 실제 세계에서 주인공은 현대의 인플루언서가 되지도, 또 화학 과장이 되지도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60년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세계를 살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소리 내 말 해야 합니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처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책을 읽고 따로 생각을 적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었고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이전에 비해 지금은 동의하는 부분이 더 많아졌습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책 끝부분의 사회 문제에 대한 글쓴이의 시각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고요. 지금은 이견이 엇갈리는 상황이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시간이 흐른 다음 다시 꺼내 읽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궁금합니다.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은 유명한 작가이지만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작가의 존재를 아예 몰랐습니다. 우연히 타임라인에 지나가는 책 소개를 보고 별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결과는 도대체 내가 이런 작가를 왜 몰랐나 싶었습니다. 겨울서점에서 소개하며 너무 좋은데 너무 기분 나쁘다는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영상을 볼 때는 예상할 수 없었지만 이미 뇌를 보관하는 방법을 책에서 온전히 읽어냈을 때 잠깐 읽기를 멈추고 눈을 꾹 감고는 ‘하 시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이야기들도 한번은 ‘시발…’ 했다가 또 한번은 ‘뭐?????’ 했다가 또 한번은 행동 공리와 상태 객관화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하고 또 한번은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했습니다. 마치 증명된 사실에서 내가 죽는 순간에 일어날 일을 상상했다가 느낀 오싹함과 비슷한 감정이었습니다. 새해 첫 책으로 같은 작가의 신작을 줄 세워 놓았습니다. 완전 기대중입니다.
한니발
지난번 가장 좋아하는 영화 장면을 생각하다가 문득 영화 한니발의 결말을 떠올렸습니다. 영화 한니발 끝에서 클라리스 스탈링이 경관의 총에 손을 들어올리며 ‘나는 클라리스 스탈링. FBI 소속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소설과 영화에서 접한 클라리스 스탈링의 전 생애에 걸쳐 이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클라리스 스탈링의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적어도 2022년까지는 이 때까지 봐 온 모든 영화의 모든 장면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너무 오랫동안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새 영화를 충분히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미 나는 클라리스 스탈링. FBI 소속이다에서 이야기했듯 이 영화를 떠나 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질척거리는 의미에서 글을 썼지만 기왕 떠나 보내는 김에 원작 소설을 한번 더 읽고 떠나 보내면 어떨까 싶어 2022년 마지막 책으로 선택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머릿속에서 희미해진 렉터 박사의 생각과 선택, 또 특별 수사 요원 스탈링의 생각과 선택이 다시 한 번 또렷해지며 이전에는 그저 싫어한다고, 또 어울리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던 소설의 결말 역시 영화 결말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납득할 만은 하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이전에는 끝부분에서 클라리스 스탈링이 이전까지의 경험과 생각에도 불구하고 한니발 렉터에게 굴복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여 왔지만 이번에 읽을 때는 클라리스 스탈링이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자신을 옭아매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며 이전과는 달리 소설의 이런 결말이라도 클라리스 스탈링이 결코 굴복한 것은 아니며 이런 선택 역시 스탈링으로써 할 수 있는 납득할 만한 결정이라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결론
2022년에는 다른 해에 비해 시간은 더 낼 수 있었지만 그 시간에 책을 덜 접했습니다. 하지만 게을리 읽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낼 수 있는 한은 재미있어 보이는 여러 가지 책을 집어 들어 여러 이야기를 접하고 또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이전까지는 타임라인에 지나가는 아무 책, 제목이 궁금한 책을 그때그때 집어 들었다면 어느 정도는 미리 궁금한 분야에 대한 책을 정해 놓고 기회가 닿을 때 그 책을 먼저 읽으면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