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워치를 ○○에 사용한다고?
애플스토어 강남이 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만간 애플워치 밴드를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느 애플 기계는 오프라인에서 구입하는 것 보다 온라인에서 옵션을 맞춰 구입하는 쪽을 훨씬 선호합니다. 가령 랩탑은 램을 올려야 하고 스토리지는 그 시점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조절할 수 있어야 하며 아이폰은 스토리지가 적어도 512기가여야 했는데 종종 오프라인 매장에는 이런 조건에 맞는 제품의 재고가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애플워치 밴드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는데 온라인에서 구입해보니 렌더링 된 사진으로 본 물건과 실제 손에 쥔 물건이 상당히 다를 때도 있었고 ‘루프’ 밴드는 잠금장치 없이 밴드 전체가 탄성이 있는 한 덩어리로 되어 있어 손목 굵기에 따라 크기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애플 웹사이트에서 크기 선택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었지만 혹시 크기를 잘못 선택하면 반품을 하고 다시 배송을 받는 별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귀찮음을 걱정했습니다. 그렇다고 매장에 쉽게 방문할 수 있는 ���도 아니었습니다. 평일에 가기는 거의 불가능했고 주말에는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 가까운 곳에 매장이 생긴 지금이야말로 루프 타입 애플워치 밴드를 구입하기 딱 좋은 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주말 오후 매장에 들러 애플워치 밴드를 이것 저것 시착해 봤습니다. 처음에는 루프 타입 밴드 세 가지만 시착해 보고 크기를 정한 다음 바로 구입해 나올 작정이었는데 스탭님이 기왕 온 김에 궁금한 건 다 시착해보자고 제안해 주셔서 궁금했던 밴드를 이것 저것, 또 이 색, 저 색 직접 구경할 수 있었고 애플워치 울트라가 얼마나 거대한지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생각과 달리 애플워치 울트라는 같은 장르의 다른 회사 제품에 비해 훨씬 작았습니다.
2023년 봄 시즌에 출시된 루프와 브레이드 루프 밴드는 웹사이트에 있는 렌더링 이미지 상으로는 무척 밝고 가벼운 느낌이지만 실제로 본 밴드는 그보다는 훨씬 칙칙한 느낌이었습니다. 색상 자체는 밝았지만 웹사이트 상의 렌더링 이미지를 보고 기대한 것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루프 밴드는 같은 재질이 스포츠 밴드였을 때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루프 밴드로 만들었더니 완전 싸구려 고무줄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스포츠 밴드는 물에 젖어도 되고 여러 충격에 강할 뿐 아니라 애플스토어가 아닌 곳에서 판매하는 유사품과 비교해 확실히 품질이 좋기는 하지만 루프 밴드에 어울리는 재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반면 루프 밴드에 비해 가격이 두 배인 브레이드 루프는 색상은 여전히 렌더링 이미지에 비해 칙칙했지만 훨씬 가볍고 또 훨씬 단단해 보여 결국 계획을 바꿔 루프 대신 브레이드 루프로 결정했습니다.
한편 물건을 준비하는 동안 지금까지 시착을 도와주신 스탭님이 아마도 시간을 때우기 위한 질문 매뉴얼에 있을 것 같은 ‘그런데 애플워치는 주로 어떤 용도로 사용하세요?’라는 질문을 듣고 갑자기 뇌정지가 옵니다. 애플워치는 그냥 애플워치고 무슨 용도가 있어 사용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질문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 무슨 주마등처럼 폰을 자리에 두고 다른 자리에서 쉬며 메일을 확인하고 메시지를 받고 아이폰 카메라를 제어해 후면 카메라로 셀피를 찍고 다음 회의시간을 확인하고 숏컷을 실행하고 심박과 일상생활의 운동량을 측정하고 또 아침에 소리 없이 진동으로만 일어나고 애플티비의 재생 상태를 제어하고 장거리 라이딩 할 때 일출, 일몰시각을 확인하는 등의 용도를 떠올렸지만 이걸 너절하게 나열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주마등을 멈추곤 ‘워치니까 시계로 사용하고 있어요’라며 웃고 넘어갔고 다행히 이 때에 맞춰 물건이 도착해 계산을 위해 대화를 멈출 수 있었습니다.
한편 어떻게 계산할 거냐고 묻길래 나도 모르게 ‘애플페이 되나요?'라고 물었는데 스탭님이 매장 내 업무에 사용하는 아이폰은 결제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탭님이 ‘당연하죠ㅋ’라며 폰을 뒤집어 보니 폰 뒤에 애플페이를 지원하는 단말기가 붙어 있었고 나는 졸지에 애플스토어에서 애플페이 되냐고 물어본 사람이 됐습니다.
브레이드 루프를 사 들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 애플워치의 용도를 생각해봤습니다. 애플워치 광고에는 워치 페이스에 온갖 정보를 가득 띄워 놓은 모양으로 소개되곤 하지만 이 모든 정보를 항상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여러 워치페이스 중 ‘Simple’에서 모든 정보와 숫자판을 제어하고 시침, 분침, 초침만 나오는 모양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계는 시계고 시계는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Solar Dial' 페이스를 사용하는데 장거리 라이딩을 할 때 일출시각과 일몰시각이 꽤 중요한데 이를 시각적으로 쉽게 파악할 수 있어 바깥에서 특히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직접적인 사용 보다는 팔목에 감겨 있으면서 계속해서 뭔가를 기록하고 이를 알려주는 용도로 사용하는데 가민처럼 자전거 탈 때 직접 조작하거나 하지 않아도 그냥 팔목에 감고 생활하기만 해도 심박, 일어난 횟수, 손 씻은 횟수와 시간, 걸어다닌 거리나 시간, 앉아있던 시간, 계단 높이 등등등등을 기록해 줍니다. 사실 이런 정보가 그리 유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재미 삼아 이 정보들을 관찰하며 패턴을 발견하거나 나도 잘 모르던 습관을 발견하는 건 나쁘지 않았고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는 애플티비나 맥북을 언락하거나 제어하고 아이폰 카메라를 제어해 후면 카메라로 셀피를 찍고 또 아침에 소리 없이 진동으로만 일어나는 것 등은 무슨 기능이라기 보다는 그냥 일상의 자잘한 빈칸을 매워 주는 수준으로 동작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정리하면 우연히 애플워치를 어디에 주로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말 그대로 시간을 확인하는 것, 애플워치가 감지할 수 있는 이벤트를 기록해 보여주고 패턴을 발견할 기회를 주는 것, 그리고 온갖 잡다한 기능들로 일상의 작은 빈틈을 매워 주는 것 정도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같은 질문을 받으면 똑같이 ‘시계로써 활용하고 있다’고 대답하게 될 것 같습니다.
추신. 이 글의 제목은 선정적 ○○ 만들기의 실험에 의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