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지 않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이 말은 장인들은 이미 자신에게 맞고 또 익숙한 좋은 도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을 포함해 일상의 거의 모든 작업에 컴퓨터와 모바일 기계를 사용하는 입장에서 좋은 도구는 먼저 책상이나 의자, 그리고 좋은 모니터와 컴퓨터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드웨어의 발전이 더디고 하드웨어에서 구동 되는 소프트웨어가 강력한 하드웨어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기 쉽지 않은 시대에 하드웨어는 큰 맘 먹고 한 번 장만해 놓으면 꽤 긴 시간에 걸쳐 하드웨어를 구입하는데 사용한 금액을 뽑을 만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하드웨어 뿐 아니라 거기서 구동 되는 소프트웨어 역시 중요합니다. 업무에 사용하는 핵심 소프트웨어와 보조 소프트웨어를 비용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잘 선택하고 이들의 기능을 익혀 익숙해지며 생산성을 향상 시킬 수 있을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소프트웨어의 사용은 항상 상용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기능을 사용하는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항상 비용은 제한되고 그 제한 안에서 적당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산이 충분한 프로젝트라도 아주 중요하지 않거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대안이 있다면 굳이 상용 소프트웨어를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프트웨어는 그 소프트웨어의 철학과 이에 기반한 설계 방식, 개발자가 예상했을 사용 방법을 이해하고 있으면 좋은데 이는 보통 소프트웨어 제작서 웹사이트나 매뉴얼을 통해서 조차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러 소프트웨어를 핵심 업무에 직접 활용해 충분히 옷을 적셔 가며 시도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검색해 보면 여러 상황에 도움이 되는 소프트웨어를 소개하고 소프트웨어의 핵심 기능을 활용하는 방법을 설명한 영상과 글이 넘치지만 이 자료들의 한계는 소개하는 사람들이 그 소프트웨어를 얼마나 깊이 사용해본 결과인지 파악하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분명 꽤 괜찮은 기능처럼 보여서 실제로 시도해 봤지만 영상에서 본 기대로 동작할 뿐 실제 내 상황과 의도에 맞게 동작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소프트웨어가 나에게 잘 맞는지, 또 내가 어떤 기능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여러 소프트웨어를 직접 사용해 보고 경험을 축적하는 방법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종종 내 워크플로우에 적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찾아보고 비용이 허용하는 선에서 직접 사용해 봐야 합니다.
가령 개인 할일 관리 소프트웨어는 처음에 Remember the Milk부터 시작해 몇몇 도구를 전전하다가 뭔가 전문적으로 보이는 Omnifocus 앱을 거친 다음 iOS와 맥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Things 앱에 한동안 정착했다가 결국 Jira에 정착했습니다. 각각을 적어도 1년 이상 사용했는데 각 도구를 사용하며 도구의 설계 철학에 적응하며 생각하는 방식과 기록하는 방식을 조금씩 바꿔야 했지만 어느 순간 앱이 아무리 자신의 방식을 제게 강요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별 것 아닌 곳에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런 작은 차이 때문에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고 사람을 바꿀 수 없다면 도구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러 여러 다른 도구들을 전전하게 됩니다. 결국 여러 동작을 상황과 취향에 맞춰 깊이 제어하고 변경할 수 있는 기업용 도구를 목표로 개발되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할일 관리 도구에 완전히 정착했습니다.
기록 도구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쳤는데 온라인 기반의 여러 위키와 iOS 기반의 필기 앱, 유명한 원노트 등을 각각 여러 해 동안 사용하며 그 기능 자체로 일상에 큰 도움을 받음과 동시에 자신의 기록 도구에 대한 취향을 찾아가기를 반복했습니다. 거의 10년에 걸쳐 디지털화 된 필기 노트에 집착했고 이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지만 장기적으로 제가 원하는 수준의 정리와 검색이 가능해지지 않으리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 다음에는 텍스트 기반의 기록 도구로 바꿨으며 이 경우에도 이전과 비슷하게 기업용 도구를 목표로 개발되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온라인 기록 도구에 완전히 정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워크플로우를 개선할 플러그인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 저것 살펴보는데 시간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 사용하는 기록 도구의 개발사가 이따금 발표하는 새로운 기능, 그리고 앞으로 몇 년에 걸쳐 개발할 계획인 로드맵을 살펴보며 이 도구가 앞으로 발전해 나갈 길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고 있습니다.
이런 행동과 생각은 대체로 일상을 살아가는데, 그리고 일을 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큰 실수를 하게 만들었고 또 할 필요 없었을 큰 실망을 하게도 만들었습니다. 앞에 다른 이야기를 길게 했지만 이 글의 핵심은 여기부터입니다.
형상관리도구에는 주로 실제 빌드에 영향을 주는 코드와 에셋만을 올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상당수 아트 에셋은 그 크기가 너무 커서 형상관리도구에 바이너리 형식으로 이를 올리기 시작하면 스토리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이들을 직접 올리지 않고 엔진에 임포트 한 상태만을 올리곤 합니다. 또한 게임디자인 쪽에서도 웬만한 문서는 버전 관리가 알아서 되는 위키를 통해 관리하지만 엑셀 문서나 파워포인트 문서처럼 일관된 버전 관리 방법을 정의하더라도 그 방법이 기존 문서 워크플로우에 잘 통합되지 않는 경우에는 문서를 형상관리도구에 올려 놓으면 평소에는 귀찮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곤 합니다. 프로젝트 수준에서 그런 문서를 위한 형상관리도구 프로젝트를 제공하지 않는 상황이더라도 개인적으로 항상 로컬에 있는 모든 개인 작업 문서를 별도 형상관리도구를 통해 버전을 관리했는데 예전에는 Visual SVN Server를, 이제는 여러 아틀라시안 제품을 사용하다 보니 Bitbucket을 사용해 버전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팀에 아주 주의 깊게 텍스트 버전 관리를 해야 할 일이 생겼는데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노션에 텍스트를 붙여 넣어 히스토리를 확인할 수 있게 하고 또 문서의 각 버전을 워드 문서로 저장해 문서를 페이지에 첨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각 버전을 잘 보관하고 각 버전의 히스토리를 정의(정리 아님)하며 각 버전 간의 차이를 비교하기에 노션은 가능하기는 하지만 훌륭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션은 버전을 정의(정리 아님)할 수도 없고 버전 간에 차이를 비교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트 에셋이나 코드가 아닌 다른 무엇을 형상관리도구를 통해 버전을 관리한다는 발상을 작업자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기는 아주 어려웠습니다. 제 관점에서는 너무 당연하고 또 이상적인 방법이었지만 또 다른 입장에서는 완전히 거추장스럽고 이상한 방법이었던 겁니다.
팀에서 여러 중요 테스트를 할 때는 항상 영상을 녹화하곤 합니다. 고화질로 플레이 영상을 녹화하면 성능에 영향을 주지만 감소하는 성능에 비해 이 영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영상을 잘라 문제 상황을 바로 의사소통 할 수 있었고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하면 영상을 정지화상으로 바꿔 아이디어를 전달하는데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분명히 일어난 현상인데 이를 아무도 설명할 수도 없었고 상황을 들은 사람들도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이야기했을 때 이 상황을 찍은 영상이 있다면 상황을 부정할 시간에 재빨리 상황의 원인을 찾기 시작하도록 사람들을 아주 쉽게 설득할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영상 촬영에는 반디캠이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저 소프트웨어의 가격에 비해 장점을 잘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가의 유틸리티를 구입해 주지는 않기 때문에 사람들 대부분이 플레이 영상을 촬영하지 않고 있었는데 한번은 플레이 영상을 촬영해 긴요하게 활용하고 있음을 설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당연히 영상 촬영의 장점을 설명하면 그 다음은 각자 허용되는 비용 - 무료 - 제한 안에서 방법을 찾아 볼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상 촬영 소프트웨어가 유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 마음속으로는 굉장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처음 설명한 대로 우리들이 비록 어떤 장인과는 거리가 멀지만 우리들이 일을 하며 일의 생산성에 영향을 주는 도구들은 계속해서 어떤 것들이 새로 나왔는지 알아보고 또 지금 사용하는 도구를 좀 더 잘 활용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보입니다. 대체로 회사에서 지급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지급 받지 않은 소프트웨어에는 딱히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결국 OBS 다운로드 주소, 설치 방법, 설정 방법, 사용 방법을 설명하고 이 소프트웨어가 화면 구석에 항상 실행되어 있도록 하고 아무 때나 녹화 시작을 누르면 바로 녹화가 시작되도록 하는 과정을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이 사례를 겪으며 스스로가 너무 옛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강하게 했습니다. 현대에는 윈도우에, 맥 그리고 아이폰이나 안드로이드 기계를 처음 시작하면 어지간한 소프트웨어가 이미 설치되어 있고 이들을 별로 손 댈 필요가 없습니다. 그나마 누군가가 신기한 스티커나 영상 효과를 사용하면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앱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업무용 소프트웨어는 그런 호기심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호기심을 가지지 않는 업무용 소프트웨어에 마치 신기한 스티커를 붙이는 것 만큼의 관심을 가진 사람이 현대에는 분명 기괴하고 또 쓸 데 없는 요구를 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으로도 여전히 이런 관심을 유지할 생각입니다. 특별히 유지하지 않을 생각이 없기 때문에인데요, 스스로가 무슨 장인은 아니지만 그렇잖아도 업무 효율이 높지 않은 것 같아 괴로워하고 있는 마당에 도구라도 좋은 것을 사용하고 또 그 도구라도 최대한 익숙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낮은 효율 조차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한편 그런 도구에 대한 관심은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비해 모두들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제 이를 인지하고 자신의 관심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