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사항 자체에 매몰되지 않기
어느 날 게임에 탈것을 넣고 싶어졌습니다. 이전에 여러 MMO 게임에 탈것을 넣던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중세 배경 게임에서는 흔히 동물을 불러서 탈 수 있습니다. 처음 게임을 시작한 주인공은 가난한 나머지 탈것이 없어 걸어 다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말을 사고 말을 성장 시키고 다른 더 좋은 말을 사기를 반복해서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띄는 강력하고 멋진 탈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탈것은 주로 수집 대상입니다. 실제 세계에서는 탈것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과 비용이 필요합니다. 실제 세계에서 자동차를 구입했다면 일단 자동차 자체가 비쌀 뿐 아니라 연료, 보험, 자동차 자체의 유지관리, 세금, 주차비 등등을 지불해야 합니다. 반면 가상 세계에서 탈것은 이런 비용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탈것을 한번 구입하면 세계 어디에 있든 탈것을 순식간에 부를 수 있고 따로 유지보수 할 필요가 없으며 연료를 채울 필요도 없고 또 보험료나 주차비를 지불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편 싱글플레이 게임에서 탈것은 일회용과 일회용이 아닌 것 정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타에서 어지간한 탈것은 일회용입니다. 길을 걷다가 걷기가 좀 지루해지면 차도로 뛰어나가 아무 차나 멈춰 세우고 폭력을 행사해 운전자를 끌어내린 다음 차에 올라 타면 됩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에는 차를 버려 두고 내 할 일을 한 다음 아직 그 차가 제 자리에 있다면 그 차를 타거나 아니면 다른 차를 다시 똑같은 방법으로 얻어 타면 되고요. 파크라이 같은 오픈월드 게임에서도 자동차는 일회용품에 가깝습니다. 세계 어디에나 부주의하게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이비 교도들은 널려 있고 이들에게 총을 쏴 차를 멈추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렵지 않게 얻은 차량은 그타와 마찬가지로 쉽게 쓰고 쉽게 버리는 것에 가깝습니다.
물론 온라인으로 넘어가거나 고급 탈것을 쉽게 입수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데 같은 유비소프트에서 만든 고스트 리컨 시리즈를 보면 후반에 헬리콥터를 미리 입수했다가 자동차로 수행할 미션을 헬리컵터로 수행해 미션을 쉽게 깰 수 있기도 한데 이를 위해 미리 헬리콥터를 입수한 다음 고이 모셔 놔야 합니다. 이런 경험은 기존에 그타에서 자동차를 쉽게 쓰고 쉽게 버리는 경험과는 꽤 다릅니다.
MMO 장르는 가상 세계를 살아가지만 경제를 설계하는 입장에서는 호시탐탐 실제 세계의 규칙을 끌고 들어와 부지런한 사용자들이 생산해 낸 자원을 자연스럽게 소모 시킬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실제 세계에서는 세계의 구성원마다 서로 다른 임금과 재화가 서로에게 전달되는 시간 차이로 인해 가상 세계에서처럼 인플레이션이 순식간에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현대에는 자본이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에 자본의 이동이 실제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과 영향이 전달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가상 세계처럼 짧아지고 있기는 하지만요. 가상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경제활동에 대한 댓가가 사용자들마다 비슷하고 게임 내 재화가 유통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에 게임 내에서 생산된 자원은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순식간에 강력한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킵니다. 그래서 경제시스템을 설계하는 사람은 항상 ‘하수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합니다. 하수구는 게임 내 재화를 없애는 여러 가지 메커닉을 말하는데 게임 같은 닫힌 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을 제어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역사적으로 하수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게임에 나타납니다. 초기에는 장비에 내구도가 있어 장비를 사용해 재화를 생산함에 따라 내구도가 감소해 이를 수리하는데 지속적으로 재화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게임 내 재화를 감소 시킵니다. 실제 세계의 메타포를 그대로 가져온 납득하기 쉬운 개념이지만 플레이를 방해한다는 점에서 현대의 사용자들에게 그리 납득할 만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가까워지면서 게임들은 장비를 성장시키는 개념을 넣고 장비 성장에 필요한 경험치를 수급하는 방법으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장비를 적극적으로 소거하는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또한 장비 강화 과정에서 동일한 장비를 하나 더 요구하거나 강화 도중 장비가 증발하는 가혹한 메커닉을 통해 게임 내 가치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바로 위에서 내구도 감소가 납득할 만한 방법은 아닐 것 같다고 이야기했지만 이런 가혹한 강화 역시 그리 달가운 방법은 아닐 겁니다.
사용자들이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수구 메커닉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단기적으로는 기분이 좋을 리 없지만 장기적으로 게임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때문에 경제를 설계하는 입장에서는 기왕이면 하수구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도 사용자들의 기분을 덜 나쁘게 만드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최근 이 디자인의 일부를 주니어 디자이너님께 맡기면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탈것을 사용할 때 사용자가 지속적으로 비용을 지불하에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참이었는데 이 설명 후 받은 질문은 그래서 탈것에 탑승하거나 호출할 때 비용을 부과해야 하는 것이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쉽게 빠질 수 있는 요구사항을 잘못 해석한 상황입니다. 이 요구사항 인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데 탈것을 통해 사용자가 비용을 지불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점은 맞습니다. 하지만 설명에 든 사례가 ‘탈것에 탑승할 때 비용을 지불한다’였다고 해서 이를 곧이 곧대로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기서 핵심은 ‘비용을 부과해야 함’이 아니라 ‘비용을 부과해야 하는데 사용자가 기분 나쁘지 않은 방법을 찾아야 함’입니다.
주니어 디자이너님들께 업무를 맡길 때 종종 설명한 요구사항을 곧이 곧대로 수행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게 틀린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일어나는 당연한 상황입니다. 핵심은 이 요구사항을 통해 게임을 개발하는 우리가 달성해야 하는 목표와 사용자가 달성해야 할 목표를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수구 역할의 일부를 탈것에 밀어 넣고 싶습니다. 사용자는 탈것을 신나게 사용하고 싶습니다. 하수구 역할을 함을 알고 있지만 탈것에 비용을 지불하는 경험이 기분 나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실제 세계에서 버스를 탈 때마다 돈을 내는 경험이 기분 나쁘지 않은 이유는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실제 세계라는 게임을 접을 수가 없기 때문에 가상 세계에 비해 불합리하고 불편하고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경험을 주더라도 계속해서 그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상 세계는 실제 세계와 달리 접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가상 세계의 메커닉을 디자인할 때는 이 점을 신경 써야 합니다. 특히 하수구 메커닉은 근본적으로 사용자를 기분 나쁘게 할 수밖에 없으므로 더 주의 깊게 디자인 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요구사항 자체에 매돌되어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