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끝의 대장장이

반복해서 플레이 해야 하는 던전을 만들었다면 이 던전을 반복해서 플레이 하기 위한 편의기능을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전통적인 MMO에서는 여러 기능을 담당하는 NPC들이 마을에 모여있습니다. 장비를 분해하거나 업그레이드 하는 일은 대장장이가 해야 할 것 같고 보석을 제작하거나 분해하거나 업그레이드 하는 일은 세공사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포션 같은 소모품 역시 상인이 해야 할 것 같네요. 이들은 모두 NPC로 표현됩니다. NPC는 일단 사람에 가까우니 마을에 모여 있어야 할 것 같네요. 이 마을에는 이 NPC들의 기능을 사용할 다른 플레이어캐릭터들이 모여 있습니다. 사실 이런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이야말로 MMO 게임이 지향하는 모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MMO 게임의 지향점이 조금씩 달라졌는데 점점 더 최상의 컨텐츠에 PvP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최상위에 PvP가 배치되어 있으면 만드는 입장에서 큰 장점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플레이어들의 수직 성장에 따른 컨텐츠를 계속해서 개발할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한때 플레이어들의 수직 성장에 발맞춰 분기마다 대규모 업데이트를 하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드는 사람들은 결코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속도를 감당할 수 없었고 아무리 초과근무를 해도 ‘할 게 없다’는 피드백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최상의 컨텐츠를 PvP로 만들면 수직 성장 시스템을 관리하고 플레이어들 간의 밸런스를 조정하며 신규 스킬 출시 같은 수평성장을 관리하며 이전에 비해 더 섬세함이 필요하지만 대규모 물량은 상대적으로 덜 필요하도록 개발 방식을 바꿔 운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방법이 전통적인 물량에 비해 쉽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그러면서 게임을 크게 성장구간과 상위 컨텐츠로 구성하게 되었는데 다시 성장구간은 메인퀘스트와 특정 던전의 반복 플레이로 구성됩니다. 전통적인 MMO에서는 필드와 던전을 모두 퍼시스턴트 공간으로 만들어 놓고 반복 사냥을 하게 만들었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던전을 인스턴스 공간으로 만들어 반복 플레이를 하게 했는데 만드는 입장에서 효율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인스턴스 공간은 싱글플레이와 비슷해 보상 수준을 조절하기도 편하고 실수가 게임 전체에 급속도로 퍼지는 일도 줄일 수 있었으며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성장의 복잡성을 줄일 수도 있었습니다. 대신 플레이어 입장에서 같은 던전을 반복해서 돌아야 하게 됐고 만드는 입장에서는 이를 최대한 편하게 만들 필요가 생겼습니다.

균열은 성장구간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장비와 보상을 갖출 때까지 반복해서 돌아야 하는 던전 컨텐츠입니다. 던전을 클리어 하고 나면 대장장이가 스폰되는데 균열 입구가 ��치된 서부원정지에서 대장장이는 30초 이상 걸어가야 하는 광장에 있고 인벤토리 크기에는 제한이 있어 던전을 연속으로 플레이할 수 없는 상황을 없애기 위한 편의 장치입니다. 이 대장장이는 마을에 있는 대장장이와 달리 분해 기능만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던전을 연속해서 돌 때 의미있고 실제 대장장이에게 필요한 기능을 사용하려면 플레이를 멈추고 광장으로 이동해야만 합니다. 단순하지만 게임 플레이를 망가뜨리지 않고 또 설정 상 크게 이상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한번은 반복해서 플레이 할 던전을 개발하면서 이런 편의 장치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던전 입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던전을 플레이 할 때마다 인벤토리에 보상이 쌓였습니다. 인벤토리를 비우고 포션을 구입하기 위해 반복 플레이 중간에 플레이를 멈추고 마을로 돌아가야 했는데 마을까지는 순간이동 해서 로딩만 거치면 바로 이동할 수 있었지만 이 반복 플레이를 깨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분해 기능을 넣으려고 했는데 다른 게임은 위 사례처럼 단순하게 해결하고 있었지만 정작 우리들이 해결하기에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대장장이 NPC를 배치하자니 설정에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대장장이는 특정 마을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새로운 대장장이를 만들어내기에는 비용이 너무 높았습니다. 현대 MMO처럼 상당히 많은 기능을 NPC 대신 인터페이스로 만들기에는 인터페이스가 이미 충분히 복잡했고 분해 기능이 던전에서만 인터페이스에 나오는 것도 굉장히 작위적이었습니다.

온갖 문제에 부딪친 끝에 던전은 반복 플레이를 요구했지만 인벤토리가 가득 차면 마을에 돌아가야 하게 됐습니다. 문득 던전 끝에 있는 대장장이와 마을로 돌아가는 포탈을 터치할 때 나타나는 ‘던전 입구로 돌아가기’와 ‘주요 성장 NPC들이 있는 광장으로 이동하기’ 버튼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며 이 결정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바로 이어서 다음 던전 플레이를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