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S 사용기와 의견
얼마 전에 심심해서 이더리움 블록체인에 ENS 주소를 만들었습니다. 이더리움 네트워크를 포함해 웬만한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참여하려면 공개키와 비밀키 페어를 만들어 잘 관리해야 합니다. 비밀키는 트랜잭션을 실행하는데 사용하고 공개키는 흔히 지갑 주소로 사용됩니다. 사용자에게 적대적인 사용 경험으로 널리 알려진 키 페어 관리는 특히 비밀키를 분실하거나 탈취당하는 상황에 복구 및 보호 받을 방법이 없는 특징 외에도 공개키를 주고 받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법정화폐를 주고 받기가 편리한 세상에서는 굳이 온갖 위험성으로 가득한 블록체인 세계에서 어렵고 복잡한 방법으로 돈을 주고 받을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여러 블록체인 개발 주체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고 ENS는 그 중 하나 입니다. 아이피 주소를 직접 사용하는 대신 도메인 네임을 통해 사이트에 접근하듯 ENS를 통해 지갑 주소를 단축해 쉽게 기억하고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이런 목적이 있어서 ENS를 만든 건 아니고 그냥 이 이름이 비어있길래 …
ENS 자체는 NFT 모양인데 이 NFT가 기반하고 있는 스마트컨트랙트가 전체 ENS 목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DNS가 여러 곳에 분산 되어 있는 것처럼 스마트컨트랙트를 실행하는 기계가 여러 곳에 분산 되어 있고 요청을 받으면 이더리움 지갑 주소를 돌려줍니다. 나머지 특징은 ICANN 도메인과 비슷합니다. 서브도메인을 만들 수 있고 각 도메인마다 여러 레코드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서브도메인은 가스비만 내면 별도 요금 없이 생성할 수 있어 이를 사용한 디센트럴랜드 네임 같은 사례가 있습니다.
위에 블록체인 사용 경험이 사용자에게 적대적이라고 소개했지만 ENS를 만드는 과정은 꽤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ens.domains에 접근해 지갑을 연동하면 ICANN 도메인을 발급 받는 것과 비슷한 절차를 거쳐 도메인을 생성합니다. 비어 있는 이름을 검색해 선택하고 기간을 결정하고 이에 따른 비용을 낸 다음 기다리면 됩니다. 눈에 띄는 ICANN 도메인과 차이라면 정보를 변경할 때도 가스비를 내야 한다는 점인데요. 소액이긴 하지만 이더리움 가스비가 만만찮아 웬만한 서비스들이 이더리움 위에 개발할 엄두를 잘 못 낸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경 쓰이는 점입니다. 생성된 ENS는 NFT 모양으로 NFT와 똑같이 거래할 수 있습니다. 이후 이를 지원하는 지갑 앱과 이더스캔 등에서 지갑 주소 대신 ENS가 표시됩니다. 하지만 ENS는 컨퍼런스 등에서 발표한 대단한 쓸모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일단 이더스캔에 내 지갑 주소 대신 표시되기는 하지만 소수의 지갑 앱을 제외한 나머지에서는 이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습니다. 가령 최근 어떤 블록체인 프로젝트의 NFT 민트리스트에 등록하려고 했는데 지갑 주소 입력하는 곳에 ENS를 넣었더니 .
문자 때문에 유효하지 않은 주소라고 튕겨냈습니다. 지갑 문자열을 직접 붙여 넣을 수밖에 없었고 또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에서도 같은 이유로 ENS로 자산을 전송할 수 없었습니다.
또 컨퍼런스 등에서 이야기가 나온 블록체인 세계에서의 아이덴티티라는 점에서도 썩 동의할 수 없었는데 이유는 ENS 자체만으로는 아무 연락 수단 역할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ICANN 도메인은 도메인 자체가 ‘웹사이트’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며 도메인을 기반으로 이메일 주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ENS는 단순히 지갑 주소를 단축하는 역할을 제외하면 쓸모가 없습니다. 이메일이나 웹사이트를 레코드에 추가할 수는 있지만 지갑 주소로 변환조차 지원하지 않는 서비스가 널린 마당에 레코드에 들어 있는 이메일 주소나 웹사이트 주소를 활용하는 서비스는 아예 없었습니다.
만약 인터넷 세상이나 블록체인 세상에서 아이덴티티 역할을 할 작정이었다면 지금의 ENS 같은 완전히 블록체인에 기반한 설계보다는 기존 ICANN 도메인에 호환되는 어떤 방법을 제시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ICANN 도메인도 소유권을 증명하면 ENS에 등록할 수 있습니다. 소유권을 증명하기 위해 ICANN 도메인 레코드에 지갑 주소를 추가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 값을 이용하면 기존 ICANN 도메인으로 지갑 주소를 단축하는 역할과 함께 기존 인터넷 세상의 아이덴티티를 그대로 가져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이건 제 스스로가 블록체인 사용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탈중앙화’에 큰 가치를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는 생각일 수 있습니다.
또 ENS는 아이덴티티로 활용하기에는 기존 지갑 주소가 가진 개인정보 문제를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지갑 주소를 공유하면 자산 현황까지 공유하게 되는데요. 도대체 누가 이메일 주소를 공유하면서 계좌 잔고를 함께 까길 원할지 모르겠습니다. 블록체인 사용자들은 지갑의 트랜잭션 기록을 개개인의 평판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여기에 별로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제 아이덴티티를 전달하기 위해 이메일 주소인 me@woojinkim.org
와 ENS woojinkim.eth
가 있을 때 어느 쪽을 전달할까요. 당연히 전자입니다. 전자는 그 자체로 연락 가능하며 웹사이트 주소를 포함하며 내 계좌 잔고를 까지도 않습니다. ENS는 여러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지금은 썩 추천할 만한 상태가 아닙니다.